정신없이 몰아치는 일 때문에 놓치는 순간이 늘어간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게으름과 잠을 사랑하는 나는 도무지 긍정하기 힘든 속도의 나날들이었다. 밤을 새우는 일이 많진 않았지만, 새벽 4시 전에 잠드는 일도 거의 없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에는 이미 과부하가 걸린 상태라, 쉬어야 할 시간엔 폰을 붙잡고 게임을 했고, 일찍 잠들 수 있는 날엔 장기간 연재된 웹툰을 찾아 정주행 하는 걸로 눈과 몸을 혹사시켰다.
돌이켜봐도 참 미련하지만, 돌아가 봐도 비슷하겠지.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서울을 잠시 떠나, 친구들을 만나며 숨을 돌릴 틈들이 있었다.
제주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제주로 향했다. 예술이란 단어는 예나 지금이나 참 내가 멀게 느껴지는 단어인데, 촬영하는 게 '아트페어'였다. 호텔에서 진행되는 아트페어는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별걸 다 신기해하며 촬영했다.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가 본 것도 처음인 것 같다. 특히 부티 난 옷을 입고, 어린 자녀와 함께 페어를 둘러보며 콜렉터로서의 '안목'을 길러주고 있는 부모들을 보는 게 신기했다. 뭔가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를 엿본 거 같은 기분도 들고.
사실 하연이와 둘이 올 만한 촬영은 아니었다. 그래도 하연이가 사랑하는 제주이에 굳이 바쁜 와중에 둘 다 움직이기로 했다. 내가 먼저 와서 이틀간 촬영하면, 뒤늦게 내려온 하연이가 나머지 촬영을 하는. 물론 행사 촬영이 끝나고 남는 시간엔 카페를 찾아가 쌓인 업무를 털어내야 했다.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건 좋더라. 벌써 제주살이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녀오기 전엔 항상 지하철을 고집했었는데, 이제는 큰 차이가 아니라면 버스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걸 엄청 좋아하는 것도 아니긴 한데, 예전에 비하면 지하철이 좀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어차피 졸 거라면 버스에서 졸아보자라는 마음이랄까.
치과치료도 이날로 끝이 났다. 이빨들아 한동안은 잠잠해주라.
여행을 떠나기 전, 고정/반고정 클라이언트들을 친구들에게 넘겼다. 박진은 그중 하나와 관계를 아주 잘 맺었고, 덕분에 박진의 생계유지의 중심축이 되었다. 마침 그 클라이언트도 비전화공방과 같은 단지 내에 있는지라 종종 불광에서 마주치곤 한다. 덕분에 차도 얻어 탈 수 있으니 나야 땡큐. 박진이가 신지숙이와 같이 일하는 덕분에 지숙이도 종종 보게 되고.
여행 중 페북에서 인사를 주고받던 송광찬 작가님. 학교 후배 이용복과도 아는 사이여서, 한국에 돌아와 함께 만나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인연이 이어져도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다는 걸 경험하게 해 준 분이다. 아내분께서 사운드 레코더 윈드실드(바람소리를 줄여주는 털+천)를 직접 제작하셨다는 글을 보고 이야기 나누다, 나도 최근에 산 레코더에 윈드실드가 필요하던 터라 연락을 드려 만나게 되었다. 이날은 부탁드린 윈드실드를 받던 날인데, 마침 행화탕에서 진행될 전시작품을 세팅하는 날이라 하여 겸사겸사 행화탕에 가보게 되었다.
작품 자체도 흥미로웠고,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행화탕도 볼 수 있어서 괜찮은 나들이었다. 자기 세계를 가지고 뭔가를 계속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좋은 기운을 받아가는 거 같다.
유하연 씨는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셀프 행복 메이커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면, 에너지가 샘솟는다. 난 장사치인지 어떤 프로젝트를 맡으면 어떻게 효율적으로 일해서 얼마를 남길까를 고민하는데, 유하연 씨는 그런 것보단 예산을 팍팍 써가며 자아실현과 자기만족을 추구한다. (물론 본인이 재미있는 일을 할 때. 반대로 나는 내가 느끼는 재미보다 그 일이 얼마나 의미 있다고 느끼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여하튼 이런 부분은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한 친구.
올해 유하연 씨는 '모두의학교'라는 평생교육기관과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처음엔 단순 사진/영상 작업에서 시작해서, 꿈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결과 책자를 만들고, 전시를 하더니 크리스마스에는 리스 만들기 워크숍을 기획하고, 거기에 더해 공간 데코까지 맡았다. 덕분에 사업자등록증에 사업분야를 추가하기도... 엄청 즐거워하며 일하는 게 보기 좋았는데, 이번에도 자아실현과 자기만족을 위해 예산을 아낌없이 쓰다가 재료가 엄청나게 남았다. 덕분에 한동안 집이 나무 천국이 되었는데, 남은 재료를 가지고 집에서 자체적으로 크리스마스 리스 만들기 워크숍을 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진짜 지독하게 바쁜 시기에 나, 유하연, 박진 셋이서 춘천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박진은 이건 여행이 아닌 거 같다며 아쉬워할 정도로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나와 하연이는 서울을 떠나 바람 쐴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좋았다. 마음의 여유가 넉넉하진 않아 일찍 숙소에 들어가서 일하고, 다음 날도 촬영 때문에 서둘러 움직이느라 사실상 하루도 채 안 되는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기회를 만들어야 삶이 좀 더 건강해지겠구나 싶었다.
진이가 추천한 춘천의 카페. 완전 옛날식 주택에 간판도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한쪽 벽을 매운 유리컵들이 인상적이었다. 각종 기념 문구가 박혀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
짧은 춘천에서 찍었던 사진 중 제일 좋아하는 사진. 하늘과 구름, 양철지붕의 색이 너무 예뻤다.
난 전깃줄이 거슬리다고 생각했는데, 진이는 전깃줄이 있어서 더 좋다고 했다. 다시 보니 전깃줄이 없었으면 좀 심심한 사진이었을 거 같네.
유하연 씨가 제 돈 주고는 절대 사지 않았을 핑쿠핑쿠한 파카. 지영애가 여행 다녀오는 길에 선물로 사 왔는데, 하연이는 그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더 열심히 입어야 한다면 한동안 열심히도 입고 다녔다. 하지만 날이 점점 추워지면서 어쩔 수 없이 핑쿠파카는 옷장 안으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본격 야스민&반야 베이커리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처음 게스트룸에 들어올 때는 크리스마스 전에 비엔나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는데, 이래저래 일정을 바꾸면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게 되었다. 유럽 친구들에겐 크리스마스가 워낙 큰 명절이고, 특히 비엔나는 크리스마스 마켓으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남짓 남았을 무렵, 취미 베이킹 5년 차 야스민은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 쿠키를 비롯한 각종 파이/케이크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자레인지 취급받던 광파오븐이 오랜만에 제값을 했다.
오랜 친구 황성민이 집에 와서 잤다. 이래저래 손님들이 가득 차 있던 시기라 거실 소파에서 재울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성민이를 포함해 학교 04학번 동기 넷 이선,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학회도 만들고, 군대도 비슷한 시기에 가고, 제대하곤 호주 워킹홀리데이도 같이 가고 했던 참 징한 관계. 지금은 다들 애 낳고,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권(성민이는 제외)에 살고 있다. 자주 얼굴을 보진 못하지만, 언제 봐도 참 편한 친구들.
크리스마스이브. 오후까지 촬영을 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너무 지친 상태에서 기록용으로만 사진을 찍어뒀더니 그 분위기가 다 담기지 않은 거 같아 아쉽. 하연이가 진행했던 리스 워크숍+공간 데코 프로젝트에서 남은 식물들, 소품들이 집안 곳곳에 잘 자리 잡았다. 특히 테이블 데코 디테일이 정말 예뻤는데.
야스민은 한국 조카와 조카 친구들을, 우리는 진이와 고니(뭔가 듀오 같네), 예지는 주로를 초대해서 집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의자가 부족해 보일러실에서 먼지만 쌓이던 접이식 의자를 오래간만에 꺼내야 했다. 야스민이 준비한 쿠키와 케이크를 바탕으로, 각자 이런저런 음식을 준비하기로/사 오기로 했는데... 닭 관련 음식만 3종류였나... 역시 한국인은 닭심인가.
사람이 너무 바글거리는 걸 힘들어하는 데다가 오후까지 촬영을 하다 돌아온지라 상태가 좋지 않아, 뭔가 준비된 걸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먼저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새벽에 일어나 거실에 나가보니 손님들은 다 집으로 돌아갔고, 파티로 어지러웠던 탁자도 깨끗해져 있었다. 회복되지 않는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먼저 들어가 잠들어버린 미안함에 괜시리 홍삼액을 꺼내와 나눴다.
매년 1-3월이 보릿고개인지라 들어오는 일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았더니, 정작 이런 날을 즐기지도 못한다는 게 뭔가 잘못 사는 것 같기도 했다. 잠깐 동안 일을 줄여야지 생각했지만, 프리랜서를 따라다니는 불안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한동안은 이런 패턴이 반복될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부디 다음 크리스마스는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즐길 수 있기를.
(그나저나 저 사진은 누가 찍은 거냐... 박진이겠구만...)
크리스마스이브의 흔적은 곤씨의 졸린 표정 위에, 그리고 알 수 없는 종이쪽지 위에 남겨져있었다. 갑작스러운 예지의 제안으로 릴레이 시(?) 쓰기를 했다는데, 내용이 참 난해했다. 두 번째 단락을 쓴 사람은 거의 래퍼 구만. 라임이...
거의 2달간 함께 생활한 반야와 야스민이 한국을 떠나는 날. 마지막까지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다니. 선물 내용은 우리 각자에게 추천하는 책. 나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받았다. 책장에 있던 <사피엔스>를 보고, 좋아할 것 같았다고. 워낙 유명한 책이지만 선뜻 시도해보지 못했던 책인데, 2019년 안에는 읽어볼까.
도화동 살 땐 이웃사촌인 셈이라 자주 봤었는데, 망원동으로 이사 오고 나서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제니가 놀러 왔다.(라고 하지만 사실 와서 같이 일했다.) 일할 때의 책상은 여전히 어지럽다.
12월이 그 어느 때보다 바쁘고 힘들었던 건, 일이 몰아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12월 안에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새해를 제주에서 맞이하려다 보니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무사히 12월 31일 제주로 향했고, 친구들과 새해를 맞으며, 본격적인 제주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부디 2019년은 2018년보다 삶의 속도를 잘 조절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