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의 묘미
디지털로도 얼마든지 편하게 물감 느낌을 재현할 수 있는 세상이다. 가끔 후작업을 할 때 디지털 방식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아날로그 작업방식을 고수한다.
지금은 아크릴 물감을 주로 사용하고 있지만, 한지와 동양화 분채를 이용한 채색화가 주전공이었던 나는 원래 물감을 만들어서 썼다. 석채(안료를 추출할 수 있는 돌)를 갈아서 아교(안료가 화면에 붙을 수 있도록 하는 동물성 접착제)를 끓여 희석한 물에 섞어 물감을 만들곤 했다. 그리고 캔버스에 젯소를 칠하듯이, 한지에도 아교로 바탕칠을 해야 하는데, 무려 다여섯번을 가로세로 번갈아가며 칠해야 한다.
그렇게 물감을 만들고 바탕칠을 하면 그림 스케치도 하지 못했는데 하루 이틀이 가버린다. 고된 작업이지만, 그림 재료를 직접 준비하는 것은 마치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신성한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티백을 우려 마시는 차맛과 누군가 찻잎을 정성스럽게 달여 다례를 갖춰 내오는 차맛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크릴 물감은 또 그 나름대로의 수작업의 묘미가 있다. 나는 매체의 물성에 따라 그리는 방식과 결과물이 다소 달라지는 편인데, 수채화에 가까운 채색화는 한 번 망치면 덮기 어렵지만 물감이 잘 마르지는 않아서 천천히 차분하게 그리는 편이다. 반대로 아크릴 물감은 엄청나게 빨리 마르는 대신, 망쳐도 덮기 편하기 때문에 빨리빨리 그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전통 채색화를 그릴 때와는 다르게 의외성이 생기기 쉽다. 팔레트에 짜둔 물감을 즉흥적으로 섞고 바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색의 조합이 나올 때도 있고, 실수로 붓이 잘못 간 것이 원래 의도한 그림보다 더 마음에 들기도 한다.
가끔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도 나는 스톱모션 형식을 선호한다. 애프터이펙트 같은 영상 프로그램을 사용해보기도 했지만, 나는 뭐가 됐든 손때 묻은 느낌 물씬 나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본 글에 첨부한 그림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사용한 해초 조각들이다. 이때 일주일 꼬박 걸려 만든 영상이 고작 8초였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방법이라고 누군가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만든 작업의 느낌은 디지털로는 구현이 어렵다. 수작업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묘미가 분명히 있다.
물론 디지털 방식으로 멋진 그림을 그리는 작가님들도 많이 알고 있다. 작업 방식은 작가의 취향과 지향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옳고 그른 기준은 전혀 없다. 단지 나의 작업방식과 지향점에 대해 한 번쯤은 기록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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