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페이지의 세계
소설가와 시인은 문장을 통해 이야기한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림책 작가는 문장과 그림을 둘 다 사용해 이야기한다.
때로는 문장이 그림이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주고, 때로는 그림이 문장이 전달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준다.
간혹 고의적으로 그림과 문장을 상충시켜 독특한 형식의 그림책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림책에 있어 그림과 글은 왼다리와 오른 다리 같은 관계다. 두 다리가 함께 합을 맞추어 걸어가야만 이음새가 자연스러운 그림책이 된다.
나에게 그림책을 만든다는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바로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배가된다. 이야기를 쓰는 것도 어렵지만,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되 뻔하지 않고 이야기와 그림이 서로의 매력을 배가시킬 수 있도록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배경, 색감, 문장의 톤 등 살펴봐야 할 사항들이 수도 없다.
그래서 그림책은 상상을 초월하게 품이 많이 들고 호흡이 길지 않고서는 완성할 수 없는 작업이다. 이야기를 쓰고, 썸네일을 구상하고, 캐릭터를 만들고, 한 장 한 장 연결하다 보면 마치 마음을 실로 뽑아내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기분이 든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나의 작품을 끝내고 보면 내 손에서 탄생한 36페이지 내외의 책 한 권 속에 새로운 세계가 탄생해 있다.
제작기간이 오래 걸리고, 창작한 더미북(가제본)의 출간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림책 작업만 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어리석을 수 있다. 나 역시 경제적인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단발적인 외주 의뢰들을 받거나 굿즈를 제작해 판매하기도 한다. 물론 외주, 콜라보레이션, 굿즈 제작도 정말 재미있고 다른 이들과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있지만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의 본진은 그림책 작가다.
지난해 11월에 퇴사해 이제 막 그림책 작가로서 첫 발을 디뎠지만, 퇴사할 때 이 길이 내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받은 위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림책은 내가 오롯이 혼자서 구축할 수 있는 세계이자 나의 내면 풍경 그 자체다.
현재까지 세상에 나온 책은 한 권, 그리고 세상에 나오길 기다리는 네 권이 있다. 현재로서는 불투명한 미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내 안에는 아직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잔뜩 쌓여있기 때문에!
인스타그램: @byjeanc
웹사이트: https://www.artbyjean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