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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Sep 24. 2020

빵 굽는 타자기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타자기 드로잉 (2020), 진청


드물지만 영혼에 새겨지는 책들이 있다.

내게도 몇 권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폴 오스터의 <빵 굽는 타자기>다. 글쓰는 청년 작가가 하루하루 어떤 것들을 생각했고, 하루에도 여러 번씩 도전적으로 휘몰아치는 창작의 어려움들을 어떻게 버텨냈는지를 풀어낸 폴 오스터의 자전적 소설이다.


처음 읽은 건 열일곱, 열여덟 즈음이었다. 한창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국어국문학과에 지원하면서, 자기소개서를 요구한 학교에는 <빵 굽는 타자기>를 인용해 글을 쓰기도 했었다. 한 때는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바라던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고 보니 글을 잘 쓰는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


나름 글 잘 쓴다고 생각했던 나는 자신감을 잃고 글을 쓰는 일은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브런치의 다른 글들에서 자세히 설명했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대학에서 미술을 이중전공으로 공부하게 되었고, 그림책에 흥미를 느끼게 되어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졸업하고서는 출판사에 일하며 작가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고, 그들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20대 내내 내가 걸어온 길은 결국은 책을 만드는 길이었다. 결국 10대 때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근거 없는 애정, 뜬구름 잡는 꿈이 아니었다. 그때 마음밭에 심은 애정과 꿈이 결실을 맺어 지금의 내가 된 건 아닐까.


전업작가가 되어버린 지금, <빵 굽는 타자기>가 갑자기 퍼뜩 생각나 다시 읽었다. 먼저 길을 가본 사람으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그 어떤 위로보다 강하다.


글을 맺으면서, <빵 굽는 타자기>의 문장 몇 개를 공유하고 싶다.



*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

내 선택을 변명할 생각은 없다.

실리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실리적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들은 정신 생활과 이윤 추구를 얼마든지 양립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를 구태여 두 진영으로 나눌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두 진영에서 동시에 살 수 있었다.


*

책 속에 파묻혀 지낸 2년 동안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인생을 바꾸어 놓는 새로운 피가 수혈되어 혈액의 성분까지 달라졌다. 문학과 철학에서 나에게 아직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거의 다 그 2년 사이에 나와 첫 대면을 했다. 이제와서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 많은 책을 어떻게 다 읽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벌컥벌컥 술잔을 비우듯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어 냈고, 책의 나라와 대륙을 모조리 섭렵했으며, 아무리 읽어도 늘 책에 허기져 있었다. ... 나는 두뇌에 불이라도 붙은 듯, 책을 읽지 않으면 목숨이 꺼지기라도 할 듯, 필사적으로 책을 읽었다.


*

나는 중량이 없는, 핏발선 눈을 가진 생물이다. 내면에서는 절망적인 격동이 파도처럼 굽이치고, 견해나 태도가 갑자기 정반대로 바뀌고, 걸핏하면 기절하고, 상상력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경향을 가진 좀 실성한 생물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올바로 접근하면, 나는 솔직하고 매력적이고 사교적인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마음의 문을 닫고,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

나는 대범하면서도 소심하고, 재빠르면서도 굼뜨고, 순진하면서도 충동적이었다. 말하자면 모순이라는 정령에 바쳐진 걸어다니는 기념비, 살아숨쉬는 기념비였다. 내 인생은 막 시작했을 뿐인데, 나는 벌써 두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

예를 들어 마르셀 뒤샹이 1947년에 파리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위해 디자인한 카탈로그 ㅡ 표지에 고무가슴이 나오는 그 유명한 카탈로그, <만지시오>라는 말과 함께 브래지어 속에 대는 고무 컵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ㅡ 에 대해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그 카탈로그는 여러 겹의 투명한 랩으로 겹겹이 싸여 있고, 그것은 다시 두꺼운 갈색 종이에 싸여 있고, 그것은 다시 비닐 봉지 속에 들어 있다.

...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이 시시한 활동을 숭배하지 말라고 뒤샹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경고는 27년 뒤에 다시 한 번 거꾸로 뒤집혀, 드러난 젖가슴이 랩과 종이와 비닐로 겹겹이 가려진 것이다. 만질 수 있던 것이 도로 만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한낱 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뒤샹의 예술은 이제 너무도 진지한 상품으로 바뀌었고, 다시 한번 돈이 최후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

이 대화는 내 무의식 어딘가에 박혀 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를 빼냈다. 기억의 작은 구멍 하나를 틀어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 구멍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었고, 거기에서 거의 20년 동안 잃어버렸던 것을 찾아냈다.




**인용문들은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김석희 역자의 번역문.



 인스타그램: @byjeanc

웹사이트: https://www.artbyjea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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