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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Sep 25. 2020

환기 블루

처음 만난 푸른색

pages from my sketchbook (2020), 진청


미술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할 때였다.

평생을 문과생, 문학소녀로 살다 갑자기 미술을 하려니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미술사 책을 무작정 사읽고 하던 참이었다. 그때 마침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를 대대적으로 다룬 전시가 열렸다.


공강일에 하루 통째로 시간을 내 전시를 보러 갔다. 아마 혼자 전시를 보러 간 것도 이 날이 처음인 것으로 기억한다. 전시장이 꽤 넓었고 전시작이 정말 많았다.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당시 걸려있던 그림들은 말 그대로 한국회화사의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의 작품들이었다.


그때는 그림을 보는 눈이 아예 없었다고 말해도 무방한데, 그래도 내 시선을 잡는 작품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시선을 잡는 데에 그치지 않고 마치 내 영혼을 건드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작품이 있었다. 바로 김환기 화백의 '사슴'이라는 아래 작업이다.



인터넷 상으로 보이는 이 색은 원화의 정확한 색이 아니다. 내가 마주한 색은 살면서 처음 보는 푸른색이었다.


사슴의 뿔과 코에만 포인트로 찍혀있는 빨간색과 대비되어, 몇 겹으로 칠해졌는지 짐작할 수 없는, 깊이 있는 푸른색이 가져다주는 분위기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이 그림을 보고 내가 느낀 감정은 충격에 가장 근접할 것이다.


그때는 김환기가 누구인지도 모른 상태였으니, 이 그림에 대한 감정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이 그림 앞에 10분 정도 멍하니 서있던 것 같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그림들을 보다가도 자꾸 이 그림이 생각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다시 보러 오길 세네 번 반복했다. 이 전시 이후로 수많은 전시들을 관람했지만, 이렇게 원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후에 환기미술관을 방문했고, 그림을 공부하면서 화백의 이름을 딴 '환기블루'라는 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흑백 이외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은 거의 모두가 파란색을 적든 많든 쓰는데, 어째서 김환기 화백의 푸른색은 이토록 남다르고 특별한 걸까?


김환기 화백은 남해의 섬에서 늘 푸른 바다를 보며 자랐다고 한다. 그가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 때 한 기자가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라고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마치 시의 한 구절 같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동해의 바닷물이 얼마나 푸른지 하얀 손수건을 담갔다가 들으면 파랗게 물이 들 정도다."


그의 파란색은 그냥 파란색이 아니라 그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색이기 때문에 그토록 보는 이의 영혼을 건드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인체 드로잉을 잘하려면 실제로 사람을 관찰하고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것처럼, 색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장 많은 색을 담고 있는 대자연이 보여주는 푸른색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그 색채를 내재화한 결과로 그의 푸른색은 시리도록 아름답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경이롭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인스타그램: @byjeanc

웹사이트: https://www.artbyjea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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