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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Sep 26. 2020

처음으로 그림을 판 날

그림과 맞바꾼 봉투 하나


처음으로 그림을 판 것은 대학교 4학년 봄학기 때의 일이다. 1호짜리 작은 선인장 그림이었다. 베이지색 바탕에, 남색 화분에 담긴 붉은색 선인장 그림.


당시에 1호짜리 캔버스 20개에 각기 다른 선인장을 그려 '선인장 분양 프로젝트'라는 작품을 과제전에 제출했다. 선인장 키우기도 바쁜 현대인들에게 시들지도 않고, 꽃도 이미 피어있는 선인장들을 분양하겠다는, 순전히 재미와 자기만족으로 기획했던 프로젝트다.


구매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코드가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해온 교수님이었다. 학생 과제전을 둘러보시다가 총 세 점을 구입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내 선인장 그림이었다.


과제전이 끝나고 정성스럽게 포장을 해서 교수님께 전달했고, 교수님은 그림값이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봉투 겉면에는 정유진 화백(畫伯)이라고 적혀있었다.

봉투 안에는 30만원이, 빳빳한 5만원짜리 지폐 여섯 장으로 들어있었다.


그림을 건네고 그림값으로 돈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분이 묘했다.

‘화백’이라는 호칭으로 불려도 되나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누군가 내 그림을 소장하고 싶어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기도 했다. 또, 학부생의 신분으로 그림을 팔아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그새 내 그림에 정이 들어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튼 여러 감정과 생각들이 오간 복잡한 심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교수님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학생들에게 '화백'이라고 불러줌으로써 그림그리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30만 원이 아주 큰 돈은 아니지만, 학생인 내게는 한 달 과외를 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그림으로 돈을 벌 수는 있구나'라는 생각을 마음 깊이 심어준 경험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회사원이 되었지만 그림의 꿈을 놓지는 못했다. 계속 그림 페어에 참가하며 그림을 팔았고, 회사에서 번 돈보다 많은 돈을 그림으로 벌게 되었을 때, 비로소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보통 그림하는 사람들은 배고프게 산다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 그림으로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프리랜서로 생활하는 지금도 다달이 들어오던 월급이 아쉬울 때가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은 그림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그림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위로인 것 같다.


내가 별 생각 없이 과제전으로 제출한 선인장 그림을 누군가 구매할지 예상조차 못했던 것처럼,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생각하지 못했던 곳들에서 오기도 한다. 어렵고 힘들고 미래가 불투명할때도 있지만, 좋다는 마음이 확실하다면 그림 그리는 삶에 도전해볼 가치는 얼마든지 있다.



인스타그램: @byjeanc

웹사이트: https://www.artbyjea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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