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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Sep 23. 2020

커피 습관

그림을 그리기 전에

coffee table (2020), 진청


어렸을 때 엄마는 아주 가끔씩 엄마가 마시던 믹스커피에 식빵을 찍어먹게 해 주었다. 보드라운 식빵에 달달한 커피가 흠뻑 적셔진 것이 얼마나 맛있던지, 아침해가 가득 들어오는 식탁에서 아끼며 먹었던 장면이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다. 믹스커피 자체가 맛있는 것도 분명 있었겠지만, 엄마가 평소에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스무 살부터 본격적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20대에는 커피를 안 마신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매일 커피를 마신 것 같다. 대학생 때 서울의 온 동네 카페를 다니며 맛을 들인 커피는, 회사를 다니면서는 생존을 위한 수액이 되었다.


회사에서는 무조건 출근하자마자 한 잔, 점심 먹고 한 잔, 그걸로 부족하면 오후 네다섯 시쯤 한 잔 더 마셨다. 차에 주유하는 것 마냥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두 잔 이상씩 마시다 보니 혹시라도 주말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반드시 두통이 올 정도였다. 신기한 건 커피 금단현상으로 생긴 두통은 두통약을 먹어도 그대론데, 커피를 마시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진다.


그러는 와중에 마시는 커피의 종류도 바뀌었다. 대학생 때는 분위기 좋은 카페를 섭렵하며 바닐라 라떼, 아인슈페너, 플랫 화이트, 모카 라떼 등 기분 전환에 제격인 화려한 커피를 여유롭게 마셨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싸고, 많이 마셔도 물리지 않는 아메리카노만 마시게 되었다.


그렇게 커피는 맛으로 먹는 음료가 아니라 각성효과를 위해 마시는 음료가 되어버렸다. 퇴사한 후로는, 커피 금단현상으로 두통이 심해져서 커피 섭취량을 일부러 몇 달간 조금씩 줄여왔다.


어느덧 퇴사한 지 10개월 차. 그 새, 나에게는 새로운 커피습관이 생겼다.


요즘은 딱 한 잔만 스스로에게 허락한다. 작업실에 도착해서 그림 그리기 전에 커피를 내려 먹기도 하고, 기분을 내고 싶을 땐 작업실 근처 카페를 검색해서 마음에 드는 곳에서 테이크아웃을 하기도 한다(작업실이 성수동에 있어 선택의 폭이 정말 넓다!).

딱 한 잔이다 보니 커피 마시는 시간이 정말 귀하고 소중하다. 예전에 엄마가 한 입만 찍어먹게 해 준 믹스커피처럼, 커피를 다시 한 입 한 입 음미하면서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작업실에 도착하면 곧장 스스로를 위한 커피를 내리고, 커튼을 열어 햇빛을 들이고, 듣고 싶은 음악을 켜고, 의자에 앉아 종이와 붓을 꺼낸다.

그 날의 기분에 따른 커피를 마시며 그림 그릴 준비를 하는 것은 내게 있어 하루 중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제 내게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그림을 그리기 전의 의식이자, 물감이나 종이와도 같은 그림의 재료인 셈이다.




인스타그램: @byjeanc

웹사이트: https://www.artbyjea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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