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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Sep 30. 2020

라이프 드로잉은 어려워

시선은 상관 말고 대범하게 그릴 것

botanical drawing (2018), 진청

작년 말, 아는 분의 소개로 그림을 가르치고 계시는 영국인 작가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회사를 다닐 때라, 연차까지 쓰고 작가님께 포트폴리오를 보여드리고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약속을 잡았다. 작가님은 건물과 풍경을 선 몇 개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작업 세계를 구축한 분이셨다.


나와는 그림 스타일이 아주 다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들을 수 있는 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화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포트폴리오를 작가님 앞에 펼쳐 보였다. 작가님은 얼마간 내 그림의 색감과 구성 방식 등등을 칭찬하시다가 별안간 라이프 드로잉은 얼마나 하는지 질문하셨다.


라이프 드로잉은 일상의 풍경들을 그 자리에서 보고 종이에 옮기는 것이다. 간단한 선으로 그리는 드로잉이라는 점에서 크로키와 비슷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라이프 드로잉은 크로키보다는 조금 더 묘사와 연출의 여지가 많은 드로잉이다.  

Bus number 299X (2018), 진청


작가님이 보시기에 내 그림은 독특하지만, 형태나 선이 내 상상 속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씀하셨다. 상상을 그리더라도 관찰하는 드로잉을 더 많이 하고 그리면 그림이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공간의 분위기, 냄새, 빛을 모두 실제로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그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 같다. 관찰과 드로잉에 더욱 애써보라는 피드백은 정말 나에게 필요한 조언이었다.


그렇지만 프로집순이인 내가 밖에 나가서 실제 움직이는 삶의 모습들을 보고 종이로 옮기는 라이프 드로잉의 전제조건을 맞추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작업실을 구한 이후로는 집 밖을 거의 매일 벗어나는 삶을 살고 있다. 지난주 중 하루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들고 라이프드로잉을 해보겠다고 혼자 작업실 근처에 있는 서울숲에 갔다.


apartments (2018), 진청


그런데 웬걸, 평일인데도 서울숲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한참을 걸어서 간신히 벤치에 자리를 잡고 색연필 통을 펼치고 드로잉을 해보려고 했는데, 두 눈은 스케치북으로 향했음에도 내 옆을 지나면서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미대를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몇 년 동안 실기실을 같이 썼는데도, 나는 아직 충분히 대범해지지 못했나 보다. 결국은 집중이 안되어서 한 장도 채 못 그리고 작업실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마음만큼은 주변 시선이야 어쨌든 흙바닥에 철푸덕 앉아서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나가니까 시선이 신경 쓰여서 도무지 그림 그리는 행위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운 걸까. 내내 내 방과 작업실에서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그림만 그리다가,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 사람들 속에서 그림을 그리려니 영 불편하다. 그렇지만 관찰력을 늘리려면 현장 속에 있어야 하고, 현장을 내 작업실로 가져올 수는 없으니 내가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는 없다. 더 추워지기 전에, 스케치북을 들고 하루라도 더 나가봐야겠다.



인스타그램: @byjeanc

https://www.instagram.com/byje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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