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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Oct 01. 2020

산책은 마음 밖 풍경을 마음으로 옮겨오는 일

걷기와 창작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마음이 지나는 풍경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일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어딘가를 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속에서 일이 일어나려면 몸의 움직임과 눈의 볼거리가 필요하다. 걷는 일이 모호한 일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풍부한 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다. 
- <걷기의 인문학>, 레베카 솔닛
밤의 서울숲 (2020), 진청 


내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까만색 고양이가 있다. 

얼마 전 저녁을 먹고 서울숲을 산책하는데, 내 그림에 나오는 고양이와 똑 닮은 고양이를 만났다.


그냥 간혹 길에서 보는 까만색 고양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양이는 원래 알던 고양이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고양이가 골목에 가만히 앉아있길래, 적당히 거리를 둔 곳에서 고양이를 관찰했다. 고양이는 나를 한 번 쓱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모른척했다. 


해가 질 즈음의 어스름한 빛, 가을의 선선한 공기 그리고 내 그림 속에서 나온 것만 같은 검은색 고양이. 

그림이 잘 안 풀려서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에서 나왔는데, 완전히 새로운 기운을 받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작업실에 돌아갔다. 산책을 하다 보면 말 그대로 '환기(換氣)', 기운이 바뀌게 된다. 


마음이 꽉 차 있다면 걸으면서 비울 수 있고,

마음이 비워져 있다면 걸으면서 채울 수 있다. 


보통 작업실에 가면 여덟 시간에서 아홉 시간 정도 있다 집에 온다. 내내 작업실에만 있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저녁을 먹고 잠깐 작업실 주변을 걷다 온다. 성수동에 작업실을 둔 이점은 거닐 곳이 많다는 것이다. 강바람을 느끼고 싶을 땐 한강으로, 풀냄새를 맡고 싶을 땐 서울숲으로, 사람 구경을 하고 싶을 땐 성수동 골목골목을 걷는다.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걷기가 아니라, 오직 걷기 위한 걷기는 다르다.

가방과 짐은 작업실에 두고, 양손을 가볍게, 때로는 핸드폰도 두고 나와서 마냥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만 집중하게 된다. 눈에 담기는 풍경은 자주 마음에 담겨 이후의 작업에 반영되기도 한다.


생각을 비우고 싶을 때 산책만 한 것이 없고, 반대로 영감이 필요할 때도 산책만 한 것이 없다. 

걷는다는 것은 신비한 행위다. 단순히 양팔과 양다리를 움직이는 행위지만, 걷는 동안 만나게 되는 세상은 아무리 같은 장소라 하더라도 항상 다르고 새롭다. 

그렇기에,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걷기란 무한히 풍부한 일인 것이다. 




인스타그램: @byjeanc

https://www.instagram.com/byje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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