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 Nov 20. 2020

식은 치킨

불금이라 치킨에 맥주가 먹고 싶어서 신랑한테 여섯 시쯤 전화해 주문을 부탁했다. 평소 앱을 사용해서 건당 삼천 원 할인을 받고 있던 터라 주문할 일이 생기면 매번 신랑을 통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이도 축구 훈련을 가서 두 시간의 여유가 확보되어있었고 난 보고 싶은 티브이 프로를 틀어놓고 훌라후프를 돌리기 시작했다.   

   

훌라후프를 한참 돌리는데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나가보니 치킨 배달이었다. 아들 축구 훈련이 끝나려면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하고 집에 와서 씻어야 하고 저녁을 먹으려면 족히 한 시간 반은 더 있어야 하는데. 순간 마음의 고요가 깨졌다.    

  

자꾸만 바삭거리는 광고 속 치킨이 떠올랐다. 내가 아는 그 맛, 바삭한 식감이 축축하게 죽어가는 것 같아 아직 뜨거운 김을 내뿜는 치킨을 앞에 두고 한숨이 나왔다. 치킨 속 따뜻한 온기는 서둘러 빠져나가고 뼛속까지 차갑게 되리라는 생각에 틀어놓은 가습기조차 꺼보았지만 그래도 집안 습도계는 50이란 숫자를 무심하게 보여줬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속이 상할까. 생각하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내 심리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지만. 오후 내내 치킨에 맥주를 마실 생각으로 종종거리며 다 돌아간 건조기에서 아직 뜨거운 빨래를 꺼내어 개고, 몇 개의 설거지를 하고, 청소포로 바닥도 밀고 하루치 정리 정돈을 마치고 가뿐하게 훌라후프를 돌린 건데..... 신랑과 아이가 오면 씻을 동안 치킨과 맥주를 세팅하고 가족이 다 볼 수 있는 예능프로를 찾고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한 불금을 보낼 생각을 하며 난 잠시나마 즐거웠다. 가슴속 파문은 쉽게 잠잠해지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바깥에서 외식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날이 길어지면서 집에서라도 금요일마다 뭔가 특별한 음식 특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소소하지만 가족이 둘러앉아 오손도손 재미난 이야기 나누면서 일주일 동안 켜켜이 쌓아온 피곤을 풀고 싶었다. 회사 다니던 시절엔 퇴근 후 친구들을 만나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새벽이 다 되도록 수다를 떨며 며칠치의 스트레스를 풀었었다. 회사라는 힘든 단체생활을 잘 버티게 해 주었던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기르며 특히나 요즘처럼 코로나로 거의 집안에만 갇혀 사는 특수한 삶을 살다 보니 그런 사치는 고사하고 집안에서 가족과 함께 재밌게 보낼 방법을 찾은 것인데.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당첨돼서 들뜬 마음에 잠도 못 자고 갔는데 내가 아는 가수나 노래는 하나도 안 나오고 알 수 없는 요즘 가수들만 나왔을 때의 기분이랄까. 푸시식 김이 샜다. 식어가는 치킨에 내 마음도 싸늘해진다. 


신랑한테 전화를 하고 싶었다. 시간을 맞춰서 주문해야 하지 않았냐고 조금은 억울함을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일을 하다 흐름이 끊기면서까지 와이프가 좋아하는 치킨을 시켜준 성의를 알기에 그냥 혼자 삭히기로 했다.  

    

아이를 차에 태워 운동장에 데려다주는데 라디오에서 내가 아가씨 때 즐겨 듣던 발라드가 흘러나왔었다. 노래를 듣느라 아이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는 걸 지금에서 알았다. 절절한 이별 가사가 심장에 깊게 뿌리내린 채 자라고 있는 나무를 잡아채는 느낌이었다. 나무뿌리에 오랜 시간 달라붙어 하나가 된 듯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심장이 꽉 조여 진채로 아파왔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걸음 한걸음에 가을이 깊게 들어와 있었다.      


가을이다. 내 마음이 우습게도 식은 치킨 따위에 두서없이 글을 써 내려갈 정도로 화가 나는 까닭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