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과를 제외하고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꼼짝없이 앉아서 책만 읽었다. 사실 내 입으로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난 책을 많이 읽지 않았었다. 살면서 지금 까지 읽은 책의 수가 아마 백권이나 될까 싶을 만큼 사실 그 보다 더 적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누군가 나에게 '어쩜 그렇게 책을 안 읽을 수가 있어?' 하고 묻는다면 아들이 내게 한 말을 빌려 말해주고 싶다. “책도 정말 재미있지만 난 더 재미난 걸 알아서 그걸 하고 싶을 뿐이야.” 내관심이 다른 곳에 가 있던 것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 속의 남의 얘기가 궁금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름의 하고 싶은 것들을 일 순위로 놓고 내 세계에서 책이라는 건 아마 책꽂이에 하나쯤은 있는 인테리어 소품 차원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아이를 낳고 겨우 너무 모르겠어서 찾아든 것이 책이었다. 육아서. 그것 또한 몇 권 읽다가 너무 진부해서 더는 읽지 않았다. 육아에도 마치 유행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굳이 유행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한 아이의 고유가 마치 다른 아이들과 같아져야만 정상인 듯 얘기하는 것이 싫었다. 무조건 유행을 따르는 몇몇 어른들의 행동이 아이들의 고유를 망치는 것만 같아서 불편했다. 어떤 책은 아이를 길들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냥 내식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내가 책을 잘못 선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을 정말 느리게 읽는다. 책을 읽을 때마다 쭉 넘어가지 못하고 한문단에 하나씩 나를 대입시키는 상념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고. 진득하게 들러붙어서 떼어지지 않는 상념 때문에 책을 읽는 속도는 더없이 느렸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없는 이유였다. 하나의 상념을 겨우 떼어내고 다시 글을 읽으려 하면 아까 읽었던 부분이 기억에서 사라진 뒤라 다시 앞에서부터 읽어 내려와야 하는데 그렇게 반복할만한 꾸준함이 내겐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앞뒤로 시간이 엄청 여유 있지 않으면 책을 들지 않았다.
육아서를 찾았을 때의 마음처럼 글이 너무 쓰고 싶은데 정말 너무 모르겠어서 책을 샀다. 소설책과 에세이와 시집을.
펼쳐진 책의 글자 위로 검은 눈동자를 포갠 채 난 또 몹쓸 상념을 데리고 왔다. 너무도 익숙해서 당연한 것처럼. 라면을 끓이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야 하는 것처럼. 책이 정말 읽기 싫어서 일까. 난 왜 내 맘 데로 책도 못 읽을까를 고민했다. 상념은 마치 무례한 사람과 동거를 하고 있는 듯 아무 때나 불쑥불쑥 내 방문을 열었고, 그만 가 달라고 제발 그만 가라고 해도 그만의 시간을 다 채워야만 나갔다.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나니 나의 이런 습관부터 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뭔가를 해보자 하고 마음을 먹고 노트를 샀다. 그 결심과 각오답게 스프링 노트를 네 권이나 샀다. 집에도 남아도는 노트는 있었지만 각오라는 걸 하기 위해선 약간의 소비가 나를 채근하기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책과 노트를 나란히 두고 책을 읽었다. 어렸을때 시험 공부하듯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생각을 그때그때 적어나갔다. 방법이 통했다. 상념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런 상태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겠다는 잡념을 불러올 때까지 잘 읽어나갔다. 책이 정말 재밌게 읽혔다. 하지만 뭐든 손에 들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 나오기 시작했다. 참 여러 가지로 대책 없는 나였다. 오랜만에 여러 책을 읽으면서 책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또 한 가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코바늘도 십자수도 책도 뭔가를 잡으면 앉은 자리에 본드를 붙여놓은 듯 꼼짝없이 다 끝날 때까지 엉덩이를 떼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코바늘을 배운 날은 가방 하나를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완벽하게 완성해야만 끝을 보는 성격. 양장을 배운 날은 잠옷이라도 하나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야 끝을 내는 성격. 책이 너무 재미있으면 여기까지만 여기까지 만을 외치면서 온 밤을 다 쓰고야 책을 덮었다. 마음에 드는 드라마라도 시작을 하면 밤새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도 엔딩을 봐야만 직성이 풀렸다. 아침이 다되어 겨우 잠자리에 든 나는 몰려오는 피곤함을 그대로 아이에게 풀기도 했었다.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놀아달라 보채는 아이를 향해 화가 난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갸르릉거렸다. 그때의 못난 내가 또 눈앞에 있었다. 다행히 책을 안 보던 공백기 동안 아이는 많이 커있었고, 다음날의 피곤은 아이가 학원 간 사이 잠깐 눈을 붙이면 되었다.
같은 영화. 같은 책은 절대 다시 안보는 나만의 불문율 또한 깨졌다. 난 뭐든 두 번 보는 건 재미가 없다. 뻔히 아는 결말에 심드렁해지고 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열 번도 더 본 영화가 있다는데 사실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제는 우연히 읽은 책에서 내가 전에 읽었던 소설책의 내용이 잠깐 등장했는데 오, 이런 느낌 이었나? 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다시 한번 그 소설책을 꺼내 읽었다. 난해하게 느껴졌던 부분이 덜 익어 떫은 홍시 맛이었다면 다시 읽었을 땐 아주 잘 익은 맛있는 대봉시가 된 것 같이 읽혔다. 궁금해졌다. 다른 책들의 맛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었을 때만 느껴지는 속살의 향기가. 책 속의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어떤 책들은 글과 글 사이에서 호흡이 느껴졌다. 청량한 맑은 숲처럼 글과 글 사이에서 안정된 고른 숨이 느껴졌다. 계속 파묻히고 싶고. 고개를 들고 싶지 않을 만큼 즐거웠다.
책을 읽는데 아이가 나를 부른다. 책 속에 나를 넣어놓고 내 몸만 쏙 빠져나왔다. 잠시 후에 나를 데리러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를 반복하는 내가 좋다. 이 번거로움이 이 거추장스러움이 좋을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미로를 헤맨다. 글과 글 사이의 작은 공간을 헤맨다. 때론 런닝만 입은 채로 때론 변기에 앉은 채로 때론 침대에 누워서 때론 책상에 앉아서. 글과 글 사이의 작은 공간이 확장된다. 점점점점 커져서 그 끝을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그 공간을 유영한다. 언제고 내가 끝내고 싶을 때까지. 그리고 알아간다. 내가 속하지 않은 세상까지.
침대에 누운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아니 좀 전까지의 나도 아니다. 나는 책 한 권을 펼쳤을 때 그 넓은 세상에 포함된다.
이번 주는 모든 게 완벽하게 좋은 날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아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그런 멋진 날.
간간이 밥을 하고 오늘치 삼인분의 반찬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간식을 준비하고, 나를 씻고, 아이를 챙겨야 하는 일들. 우리 집의 생명체에 눈길을 줘야 하는 시간이(참. 집나 갔던 태마가 돌아왔다(도마뱀)) 필요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완벽하게 멋진 날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너무 좋은데. 읽을수록 쓰기가 어려워진다. 너무 좋은 글들이 이 세상에 무수하다고 느껴서일까. 아님 다른 책들을 읽을수록 내 글들이 너무 초라하다 느껴서 일까. 시작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책을 읽기 전보다 훨씬 더 쓰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당분간은 이 고민을 뒤로하고 열심히 읽어보고 싶다. 당장은 이 기분 좋은 감정을 마구마구 누리고 싶다.
집에 책이 점점 쌓여간다. 벽에 가지런히 놓인 책장의 공간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며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간다. 책을 사고 싶어서 읽어야 했다면 읽고 싶어서 사고 싶은 마음이 가득 생겼다.
아직 알라딘에서 도착 안 한 책을 기다리며.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주말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