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 Dec 01. 2020

착하면 안 돼.

어쩌다 알게 된 착한 동생이 있었다. 너무 착해서 죄지은 마음으론 도저히 그 맑은 눈동자를 바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선한 눈과 마음을 갖은 동생이었다. 동생의 시댁은 달랐다. 그분들은 교회의 중요한 직책까지 맡고 계신 분들이었는데.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으로. 어쩌다 가본 집은 거실의 제일 넓은 벽을 메우고 있는 책장에 교회 관련 서적들이 그분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그분들의 신앙심에 대한 올곧음을 그 집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선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고,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집안 곳곳을 꾸민 듯 보였지만 자비나 은혜, 사랑은 그분들이 아껴서 매일 닦아내는 성경책의 먼지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잠깐 이야기를 나눈 동생의 신랑에게선 시어머니의 젖비린내가 시큼하게 풍겼다. 시부모님은 동생의 착함을 연약함으로 이해하고 그 이해는 곧바로 동생을 자기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해석하셨다. 동생의 가정까지 사사건건 참견하고 마음대로 하려고 들었다. 급기야 동생이 아파 며칠 입원한 틈을 타서 시댁과 남편 합가를 했다. 동생은 지쳐갔고, 힘든 상황을 이겨내려고 기꺼이 무뎌지기로 했다. 그 착한 눈빛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기력이 동생을 움직이지 못하게 친친 감아버렸다. 어떤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동생의 눈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생은 배신감이 너무 커서 가슴에 작게 난 상처가 점점 커다랗게 뚫려가는 모습을. 그 후로도 스며드는 아픔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살았다. 내 상처를 바로 쳐다본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도 힘든 일인지 예방접종을 가서도 왼팔에 뚫고 들어 오는 가늘고 얇은 주삿바늘을 바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는 게 사람인데. 어쩌다 한번 맞는 주사도 ‘안 아프게 놔주세요’를 웃으며 애원하는데.      


동생에게 말했다. “네가 변해야 해. 네가 나빠서 변해야 한다는 게 아니야. 사람 안 변해 특히 다른 사람은 나로 인해 나를 위해서 변하지 않아.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변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그 노력 또한 그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서 너에게 맞는 옷을 재단하듯 꼭 들어맞게 변할 수가 없어. ‘나’는 다르다고 생각해. 나는 너무 나라서 내가 싫은 데로 뜯어내고 고칠 수가 있잖아. 물론 많이 힘들 거야. 처음엔 상처가 데인 것처럼 더 많이 아파 올 거야. 강한 회오리에 휩쓸릴 수도 있고.”     

 

“말해서 안되면 소리 질러야 해. 사람들마다 청각이 다 달라서 못 듣는다 생각하고 여유되면 성능 좋은 보청기를 사드려야겠다는 친절한 마음으로 소리를 질러야 해. 당장 힘든 건 참을 수 있지만 번번이 반복되게 두는 건 너의 잘못 일 수 있어. 아프다고 소리치고, 싫다고 말해야 해.”

     

“너의 착함이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너를 바꿔서라도 네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바꿔놔야 해. 너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매일 너를 바라보고 웃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무기력해지게 두면 안돼. 네가 나아지기 위해서 기꺼이 나빠질 필요가 있어.”     


나는 세상에서 착하다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착하다는 그 좋은 단어를 가지고 사람들은 장난을 친다. 웃으면서 가장 잔인하게 옭아맨다. 상대가 어릴수록 어수룩할수록 마음대로 조정한다. 나 역시 오랜 시간 착하다는 말에 길들여져 있었다. 다섯 딸 중 넷째의 자리가 인정 욕구에 목이 마른 상태라 나에겐 더욱 가혹했을지도 모른다. 착하다는 말은 달콤했고, 이미 상대방의 명령이나 부탁을 거부하는 순간 더는 착할 수가 없는 그 말은 나를 통제하기에 적절했다. 착한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임무라도 하달받은 것처럼 난 상부의 명령에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 식으로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했다. 착하다는 말을 들으면 하기 싫어도 했어야 했고. 돕기 싫어도 도와야 했고. 사실은 돕는다는 말보다 착취를 당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그럴수록 상대는 더욱 잔인하게 착하다는 칭찬을 퍼부었다. 어쩌다 한번 시키는 데로 안 하는 날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원래부터 안 했던 사람들보다 더욱 나쁜 사람이.      


그래서 난 내 아이한테 단 한 번도 착하다는 말을 안 했다. 대신 고맙다는 말을 사용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니 덕분에 엄마가 일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어.” “사촌동생하고 놀아주면 동생이 아주 좋아할 것 같아.” “태로를 산책시켜줘서 태로가 오늘 하루를 선물을 받은 기분이겠다.”      


세상에선 착하다는 게 단점으로 통한다. 어른 말을 잘 듣고 사회 규점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아주 좋은 뜻이지만 지금은 바보라고 읽는 듯하다. 아이들에게 나가서 착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부모도 있다. 물론 말 자체로는 ‘착하게 굴어야지.’ 하면서도 ‘친구가 때리면 너도 때려’ ‘짝꿍이 색연필 안 빌려주면 너도 아무것도 빌려주지 마.’ 그리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잘 놀고 있는 아이 앞에 서서 “너희들 착하지? 우리 00랑 사이좋게 지내야 해” 하며 웃다가도 자기 자식이 술래라도 한번 하면 ‘너희들 왜 00만 술래 시키니? 착하게 서로서로 놀아야지’ 하며 놀이판을 다 깨고도 모자라 그 집 아이에게 술래도 시키지 말고 잘 어울려 놀아야지만 착한 사람이라고 착함의 기준까지 바꿔놓았다.


동생은 숨이 안 쉬어져서 울며불며 힘들다고 살려달라고 소리쳤다고 했다. 며칠간 번개가 번쩍하고 집안을 갈랐고 우르르 쾅쾅하고 천둥도 쳤지만 그게 다 였다고 했다. 그리고 큰집을 둘로 나눠 전처럼 작은 두 집으로 각각 이사했다. 아늑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착하게 살면 안 되는 세상이다. 착하고, 정직하고, 성실함이 비웃음 거리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에서 착함을 빼고, 성실함을 빼고, 정직을 빼면 이 세상은 무엇으로 따뜻해질 수가 있을까. 배려의 기본은 무엇일까. 착한 마음에서 오는 것 아닐까? 요즘은 기본의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그만큼 자신만의 고유함을 수북이 갖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기본이 기본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직하고 착하고 선하 고의 기본은 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마음을 지킬 수 있게 그래서 주변에 널리 선한 영양력을 행사할 수 있게. 그 마음을 갖은 이들이 바탕이 되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수 있게 그 따뜻한 단어가 타인을 옭아매는 수단이 되지 않고 그 뜻 그대로 잘 사용될 수 있길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읽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