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문득, 마음가는대로 들은 노래들–1
네가 떠난 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렇게 지내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을 무렵,
새로운 연인이 묻는다,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글쎄, 그걸 어떻게 말하나,
그래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바다만큼 파랗지는 않고
하늘빛과는 또 다르며
폭풍우 치며 울부짖는 바다보다도 깊은,
그 빛깔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너의 눈, 너의 눈동자.
뉴질랜드 가수 미치 제임스의 새 앨범
⟪This is not what I had in mind⟫에서
여섯 번째 트랙인
⟨My Favourite Colours⟩.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
그 묘사할 수 없는 빛깔이
너의 눈빛인 걸 어떻게 얘기하느냐고,
그래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너의 눈이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기는커녕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는 것을,
차마 말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그러나 어쩌면 이 노래가 다루는 것은
색깔 그 자체가 아닌지도—
눈은 영혼을,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
실제로는 당신과 내가 나눈 눈빛들,
서로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
너의 마음을, 영혼을,
우리가 함께 한 순간들을
노래하는 것.
2분 남짓한 짧은 곡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슬쩍 미뤄뒀다가
1절의 끝에 가서야 마침내
‘당신의 눈’을 이야기하다니,
꽤 인상적인 전개가 아닌가.
그러나 더 흥미진진한 것은
역시 노래의 끝부분이다.
But when you’d ask me
I never had to lie
I couldn’t wait to say your favourite lie
The colour of your eyes
너의 눈빛이야 말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 이라니.
나를 떠난 너에 대한 원망을
이렇게 슬쩍, 낱말 하나로 끼워넣으며
살짝 다른 결의 사랑 노래를 만들다니.
가사 전문 : https://www.azlyrics.com/lyrics/mitchjames/myfavouritecolour.html
구스타프 말러의 연가곡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는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과 결혼식을 올리고,
상실과 비탄, 슬픔으로 방랑길에 오르는
화자의 내면심리를 다룬다.
특히 네 번째(이자 마지막) 노래
⟨내 사랑하는 이의 푸른 두 눈⟩에서
(⟨Die zwei blauen Augen von meinem Schatz⟩)
나를 허허벌판으로 내던진 것은
그대의 푸른 두 눈동자였으니,
작별의 말도 미처 전하지 못한 채
사랑하던 곳(과 사람들)을 쫓기듯 떠나며
짐짓 그 눈을 탓해 보는 것이다.
오 푸른 눈이여, 왜 나를 쳐다보았는가?
이제 슬픔과 비탄만이 영원히 내 것이네!
O Augen blau, warum habt ihr mich angeblickt?
Nun hab’ ich ewig Leid und Grämen!
그 순간 그대, 왜 나를 보았는가.
내게 던진 눈빛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나.
미치 제임스의 가사마따나,
’그대의 눈빛이야말로
그대가 가장 좋아했던 거짓’은
아니었을까.
1884-1885년 사이 쓴 이 연가곡은
교향곡 1번에 재활용되기도 하는데,
여러모로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Wintereise)⟫, D.911을
떠오르게 한다.
⟨내 사랑하는 이의 푸른 두 눈⟩에서
장송행진곡 풍의 중간섹션을 지나면
3분 10초경부터 평화로운 분위기로 바뀌는데,
여기서 방랑을 떠난 화자는,
(⟪겨울나그네⟫ 5번째 곡 제목인)
‘보리수(Lindenbaum)’ 아래서
사랑으로 괴로운 나날 이후 처음으로
평화로운 잠을 청하게 된다.
(‘Lindenbaum’은 사실 피나무의 일종이라지만,
우리에게 더 익숙한 ‘보리수’라
칭하기로 하자.)
사실 첫 번째 곡 ⟨내 사랑의 결혼식날⟩에서
(화자는 제발 시들지말라고 외치지만)
아마도 결국엔 시들어 버렸을 것이 분명한
작은 파란 꽃 대신에
(Blümlein blau! Blümlein blau!
Verdorre nicht! Verdorre nicht!),
이제 여기, 마지막 곡에서는
하얀 눈꽃이,
‘보리수’ 아래 내 몸 위에 피어난다
(Unter dem Lindenbaum,
Der hat seine Blüten über mich geschneit).
파란 꽃 대신 하얀 눈꽃처럼,
그렇게 당신의 푸른 눈도,
그리고 그 모든 기억도
언젠가는 희미해질 것이다.
하얗게,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가사 전문 (독일어 & 영어) : https://oxfordsong.org/song/lieder-eines-fahrenden-gesellen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를 떠올린다면,
러시아 로망스 ⟨Ochi Chernye(검은 눈동자)⟩를
빼놓을 수 없겠다.
예프헨 흐레빈카의 1843년 시에,
플로리안 헤르만의 1879년작
⟨Valse hommage⟩에서 곡조를 따
처음 노래로 만들어졌고,
유명한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이
대중화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가사는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고,
곡조 역시 다양한 수정 버전이 있으나,
샬리아핀의 버전이 가장 사랑받는 듯하다.
이 노래는 역시 저음의 남성 가수가
부르는 것이 잘 어울리고,
그게 남성합창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러시아 적군 합창단(Red Army Choir)이
부르는 이 동영상에서
화자는 앞선 두 노래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노골적으로 당신을 원망한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적절치 못한 순간에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나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라고,
당신이 내 모든 행복을 영원히
가져가 버렸다고,
당신의 검은 눈동자가 내 삶을
망가뜨려 버린 거라고.
가사 원문 및 영어 번역문: https://www.russianforfree.com/best-russian-music-20-16-ochi-chornye.php
니나 시몬의
⟨Black is the Color of
My True Love’s Hair⟩에서
까만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가 아니라, 머리카락이다.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의 민요로,
아마도 스코틀랜드가 연원이라고 여겨진다.
카운터테너 안드레아스 숄의 노래로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으나,
정녕 이 곡을 사랑하게 된 건
니나 시몬 덕분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몇 가지 설에 의하면,
앵글로-색슨계의 민요에서
굳이 머리를 검은색으로 설정한 것은
집시—떠돌이이자 천대받는 자—를
암시한다고 하는데,
아프로-아메리칸인
니나 시몬이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Black’은, 음, 그러니까…
‘BLACK’이 된다.
그녀가 이 노래를 처음 녹음했다는
1955년은,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한,
그래서 대규모의 민권운동이
촉발된 해이기도 하다.
훗날 1966년 발매된 정규앨범
⟪Wild is the Wind⟫에 수록된다.
언제나 자신의 노래에
마법적이고 주술적인 힘을 부여하는
니나 시몬의 목소리에 힘입어,
‘검은 머릿결의, 장밋빛 입술의
내 진실로 사랑하는 이’가
마치 구체적인 누군가로
현현(顯現)할 것만 같은 실체성을
얻는 느낌이랄까.
가사 원문 : https://songofamerica.net/song/black-is-the-color/
우리나라에서는 ‘금발의 제니’로
더 친숙한,
스티븐 포스터의 곡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연갈색 머리의 지니)⟩는,
‘여름날 대기 중에 떠도는 수증기’처럼
잡을 수 없고 돌아오지 않을,
잃어버린 사랑에 대해
그저 꿈을 꿀 수 있을 뿐,
한숨만 지을 뿐이다.
1850년 포스터와 결혼했으나,
3년 뒤부터 별거에 들어간
Jane Denny McDowell의 애칭이
‘Jeanie’였다고 하고,
1854년 이 노래를 쓴 것은
그녀의 사랑을 되찾고 싶어서였다고
전해진다.
가사 원문 : https://songofamerica.net/song/jeanie-with-the-light-brown-hair/
우리나라에는 머리카락이든 눈동자든
특정색을 언급하는 노래가 흔치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테다.
(신중현의 ⟨빗속의 여인⟩을 비롯해,
‘검은’ 또는 ‘까만’ 눈동자는
여러 노래에서 언급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굳이 고르라면,
심봉석 시, 신귀복 곡의 가곡 ⟨얼굴⟩의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를
꼽겠다.
1974년 포크가수 윤연선이 불러
대중적으로 사랑받았지만,
요즘은 원래의 목적대로
클래식 음악가들이 더 많이 부르는 듯하다.
무심히 그리려던 동그라미,
어느새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이윽고 동그랗게 동그랗게,
내 기억 속을 오랫동안 맴도는 얼굴.
무심(無心)에서 시작해 생심(生心)이 되고,
유심(有心)히 골똘하게 되는
그런 얼굴 하나쯤,
다들 있기 마련 아닌가.
그러나 노래는,
유심하게, 가 아니라 무심한 듯
담백하게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소프라노 정지원의 목소리,
피아노는 이범재의 연주다.
가사 전문 : https://music.bugs.co.kr/track/449434?wl_ref=list_tr_08_ab
기왕 팝으로 글을 시작했으니,
팝으로 마무리해볼까.
킴 칸스의 1981년 노래
⟨Bette Davis Eyes⟩.
우리는 ‘그대의 푸른 눈’에,
‘검은 눈동자’에,
‘가장 좋아하는 색’에 상처를 받지만
그러나 또 금세,
또 다른 눈빛에 이끌리지 않던가—
새로운 사람이 베티 데이비스와 닮은
눈을 가졌다면 더욱더.
노파심에서 사족을 붙이자면,
베티 데이비스가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저 당신이, 또 내가
다시 한번 누군가의 눈에
홀리게 된다는 것.
가사 전문 : https://genius.com/Kim-carnes-bette-davis-eyes-lyr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