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를라티, 바흐, 페르골레시, 하이든, 슈베르트, 쇼팽, 그리고 아델
스페인 출신의 피아니스트
하비에르 페리아네스가 최근 내놓은
⟪스카를라티 소나타집⟫을 듣다가
아, 이런 곡이 있었나,
이렇게 서늘하고 고요한 슬픔이,
싶어서 들여다보니 f단조, K.466.
(K. 는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를 정리한
미국의 음악학자이자 하프시코드 연주자
랠프 커크패트릭의 성을 딴 것으로,
‘커크패트릭’이라고 읽으면 된다.)
느리고 슬픈 음악을 좋아하는 내가
어떻게 이 곡을 몰랐지 싶어 찾아보니,
공교롭게도 그동안 내가 들었던
언드라시 쉬프, 알렉상드르 타로,
클레어 황치, 예프게니 수드빈,
이보 포고렐리치 등 어떤 연주자도
K.466을 녹음한 사람이 없었다.
1685년 나폴리에서 태어나
1757년 스페인에서 사망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550여 곡의
건반악기를 위한 소나타를 남겼는데,
바로크 시대였던 만큼 대체로
장조의 밝고 경쾌한 곡이 많고,
그게 스카를라티 음악의 매력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나로서는
새로운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더군다나,
f단조(바단조)라니 말이다!
(페리아네스의 연주는 인터넷에 뜨질 않고,
대신 튀르키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파질 사이의 연주다.)
사실 f단조라면 내 마음속에는 늘
J.S.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제2권의 f단조, BWV 881이 떠오른다.
이 얼마나 고즈넉한 슬픔인가.
‘네덜란드 바흐 협회’의 설명에 따르면
바흐는 특히 ⟪평균율⟫ 2권에서
옛시대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인
‘갈랑(galant)’을 혼합하는데,
특히 이 전주곡과 푸가 f단조는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첫 도입부의 ‘한숨 쉬는 듯한’
8분음표들은 ‘갈랑’의 대표적 특징,
단순하며 노래와 같은 멜로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푸가는 전주곡과의 대비를 위해
조금 강건한 느낌을 주지만,
앞서의 ‘한숨 쉬는’ 동기와 유사한
병행 3도와 6도의 사용으로 인해
두 곡이 (다른 전주곡과 푸가보다)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작곡가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샤르트는
1782년, “옛 스타일의 비가(elegy)로서,
‘깊고도 깊지만, 감미롭기 이를 데 없는
슬픔의 정서’라고 표현”한다.
(이상의 설명은
네덜란드 바흐 협회 홈페이지 참조)
또 비록 ⟨3성인벤션⟩ f단조를 위해
사용된 문장이기는 하나,
“절망과 고통을 엄숙하고
사색적인 색채로 표현”한다는 것은
이 전주곡과 푸가에도,
나아가 건반 협주곡 5번(BWV 1056) 같은
다른 f단조의 작품에도
공히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김경임, ⟨J.S. 바흐의 건반음악⟩, 52쪽)
작곡가이자 시인이었던
크리스티안 슈바르트가 그의 책
⟨음악 미학을 위한 개념들⟩(1806)에서
분류한 조성별 특징을 인용하자면
f단조는 “깊은 절망, 망자를 떠올리는 슬픔,
비참과 고통에 찬 신음, 혹은
심지어 죽음을 향한 동경”과도
같은 정서를 표현한다.
(웨스턴 미시건 대학 홈페이지 참조 :
“Deep depression, funereal lament,
groans of misery and
longing for the grave”를
어설프게나마 옮긴 것이다.)
그리고 같은 조표를 사용하는
나란한 조인 A♭ 장조 역시
“죽음을 상징하는 조성으로,
소멸과 부패, 신의 심판,
그리고 그 밑바탕에 깔린 영원성”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붙여놓았는데,
f단조의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Key of the grave.
Death, grave, putrefaction, judgment,
eternity lie in its radius.”)
슈바르트의 설명은 대체로
현대적 평균율이 자리 잡기 전,
조성에 따라 음의 간격이
그 조성의 성격에 맞춰
조금씩 달라졌으며
♭과 ♯의 처리 역시 다르게 접근했던
작곡/연주 전통에 기반한 것이니만큼
(조금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C♯과 D♭은 동일한 음이 아니었다),
현대적인 평균율이 자리 잡는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좀 맞지 않는 부분도 있겠으나
그래도 당시까지의 작곡가들이
이런 특성을 기본적으로 공유했거나
적어도 이러한 전통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면,
스카를라티와 바흐의 작품들에서
슈바르트가 말한 것과 같은 정서를
찾아보는 것이 과연 무리일까.
더구나 ♭이 4개나 붙는 이 조성은
낭만주의 시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리 널리 사용되지도 않았는데,
평균율 이전의 다양한 악기들을
조율하는 기술적 어려움과
화성적 전통의 제약을 생각하면,
4개의 ♭이 붙는 A♭장조/f단조는
그 반대편의 ♯이 4개 붙는
E장조/c♯ 단조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화성의
양 극단이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 바흐가
아들들의 교육을 위해 작곡한
인벤션을 생각해 본다면,
총 24개의 장/단조 조성에서 빠진
D♭장조, c♯단조, e♭단조, G♭장조,
f♯단조, A♭장조, g♯단조,
b♭단조와 B장조의 9개 조성 중에서
f♯단조와 c♯단조, A♭장조는
♭과 ♯이 3~4개이지만
나머지 조성은 다섯 개 이상 붙는,
실용적인 이유에서 굳이 넣을 필요가
없었던 조성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f♯단조와 c♯단조, A♭장조는 빠졌는데
f단조는 포함된 것도 꽤나 흥미롭다.)
더구나 ♭은 대체로 하강을,
반대로 ♯은 상승을 의미한다는
특성을 고려한다면,
A♭장조 / f단조의 조합은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한계점,
하계(下界; the grave)를 떠오르게 하는
측면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노래하는 곡인
⟨Stabat Mater(슬픔의 성모)⟩가 종종,
f단조로 작곡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일
페르골레시의 ⟨Stabat Mater⟩ 역시
f단조로 작곡되었다.
고요하고 사색적인,
자신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신의 아들이자 대리인인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며,
인간적으로 슬퍼하기에는
너무나도 과중한,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슬픔.
아마도 ‘longing for the grave’는
‘죽음에 대한 동경’이라기보다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동경,
죽음을 넘어서는 또다른,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어질,
그런 것에 대한 희망과도 같은 것일 지도.
(A♭장조와 f단조가 나란한조인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악장마다 조성이 달라지거나
악장 내에서도 조바꿈이 잦은
교향곡과 같은 소나타 형식의 작품에서
f단조의 특징 운운하는 것이
조금은 무리일 수 있겠으나
여기 독특한 교향곡이 하나 있으니
바로 하이든의 ⟨교향곡 49번⟩ f단조,
이른바 “La passione(수난곡)”이다.
모든 악장이 f단조이고
(3악장 메뉴에트-트리오의
트리오 부분만
같은 으뜸음조인 F장조다)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라는
이전 시기의 고풍스러운
‘교회 소나타(Sonata di chiesa)’ 양식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1악장은 Adagio, 3/4박자인데,
이전에 글을 올렸던
떠오르는,
성스럽고 거룩한 슬픔의 정조다.
그러니 사후적으로 “La passione”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놀랍지 않다.
여기서 이탈리아어 ‘la passione’는
소문자로 쓰는 ‘passion(열정)’이 아니라,
대문자의 ‘Passion(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읽어야 한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할 때의 그 의미다.)
2악장과의 대비도 흥미로운데,
거침없이 몰아치는 음표들의 파도가
‘수난곡’의 주인공이 응당 겪어야 하는
온갖 역경을 표상하는 듯한데,
여기서 하이든은 C.P.E. 바흐 풍의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양식을
끌어들인다.
f 단조는 딱히 오케스트라에
어울리는 조성은 아닌 듯 하지만,
하이든이 f단조라는 통일성 속에서
변화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Passion’ 이야기를 했으니,
베토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32곡의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f단조는 두 곡.
소나타 1번 Op.2-1과
23번, Op.57, 이른바
“열정(Appassionata)” 소나타다.
1악장의 느린 서주는 어떤 면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f단조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한데
웬걸, 베토벤은 그저 베토벤이다.
그의 특유의 비장미가 압도적이다.
사실 “Appassionata”라는 별칭은
1838년 네 개의 손을 위한 편곡판의
출판업자가 붙인 것이고,
imslp.org에서도 확인 가능한
베토벤의 필체로
“La Pasionata”라고 쓰여 있다.
(하이든의 교향곡에 붙은 별칭
“La passione”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Passion’의 어원은 고통(suffering)이며,
그 고통에 대한 격렬한, 폭풍과도 같은
감정의 분출을 의미한다.
그러니 현대 한국어의 용법에서는
긍정적인 맥락에서 주로 사용되는 듯한
‘열정(熱情)’으로 번역되는 것이
그리 타당하지는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일/꿈에 대한-’,
‘당신을 향한-’ 등의 용례를
떠올려보라.)
의미상으로는 ‘격정(激情)’이
더 어울려 보이고,
이 소나타를 ‘열정적으로’보다는
‘격정적으로’ 연주하는 것에
더 마음이 가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긴 세월
‘열정’으로 통용되고 있으니
그저 따를 밖에.
흥미로운 사실은,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미국 피아니스트이자 학자인 찰스 로젠은
이 곡에서 f단조를 선택한 이유는
“1악장에서 가장 낮은 F음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텐데,
“깊고 어두운” 음색의 이 F1음이
베토벤 당대의 피아노에서는
“건반에서 가장 낮은음”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미 거의 모든 조성을
활용하기 시작했던 낭만주의 시대,
‘겨우’ ♭이 4개 붙은 이 조성이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슈베르트라면 얘기가 다르다.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한 대의 피아노에서
연주하는 이른바 ‘연탄곡(聯彈曲)’인
⟨네 개의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 D.940.
과연 이 곡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생애 마지막 해인
1828년에 작곡되어
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아마도 그가 연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에스터하지가의 카롤리네에게
헌정되었는데,
애초 그러한 의도 때문인지
첫 주제의 부점 리듬은
헝가리풍 리듬을 암시하며,
두 번째 주제는 좀 더 어둡고
마치 ‘장송곡과도 같은’ 색채를 띤다, 고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설명한다.
이것이 꼭 f단조의 특성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테고,
내 생각에 슈베르트의 기본 성향이
늘 ‘죽음’이라는 주제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던 것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특히 이 작품과 더불어 같은 해 작곡된
마지막 소나타 세 곡은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영원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고,
나는 감히, 생각해 본다.
거의 모든 조성의 피아노 작품을 남긴
쇼팽에게는
(⟨24개의 전주곡⟩, Op.28을 생각하면
‘모든 조성’이라고 해도 되겠으나,
비교적 큰 규모의 악곡만 고려하면 그렇다),
f단조가 그리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발라드 제4번⟩ Op.52를 듣다 보면,
아, 역시 f단조는 f단조인 것인가,
싶어진다.
종소리와도 같은 서주에 이어
f단조의 제1주제가 등장하는데,
과연 참으로 우수 어린, 서늘하고
고요한 슬픔이지 않은가.
그러나 변주와 제2주제의 등장,
그리고 두 주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들면서
때로는 격렬하고 통렬한 아픔으로,
때로는 예기치 못한 평화로움까지
다채로운 색채를 보여준다.
그가 남긴 4곡의 발라드 가운데
가장 길이가 길고,
음악적으로나 기교적으로나
어렵기로 유명한 이 곡이 과연
스카를라티의, 바흐의 f단조에서
얼마나 멀리 온 것인지,
혹은 과거의 전통을 발판 삼아
쇼팽 만의 고유한 슬픔과 격정을
채워나간 것은 아닌지,
듣는 사람이 판단할 몫일 터이다.
특정한 조성이 과연 다른 조성과
근본적으로 차별적인 지 여부는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는 듯하다.
현대적 평균율 체계가 자리 잡은 뒤
작곡된 작품들은,
심지어 무조음악으로 기존의 조성체계가
근본이 흔들린 이후의 음악들에서는
그리 차이가 없다는 의견이
대세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자신이 좋아하는 곡들이
조성이 다 같다는 사실을 무심코
발견하고는 놀라워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재미 삼아
주제의 레딧(reddit) 글타래를 봐도 그렇다.
아마도 몇몇 조성들은 특정 악기군에
더 잘 어울리는 게 사실이며
(예를 들어 D장조/d단조는 현악기,
E♭장조는 금관악기 등),
후대의 작곡가들 역시 작곡할 때
그에 더해 과거 작품들의 관습과
전통들을 고려해
특정한 정서를 염두에 두는 경우도,
혹은 아예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베토벤의 사례에서 보듯이,
사용할 수 있는 음역대와 그 한계를
고려한 작품들도 존재할 수 있다.
쇼팽의, 슈베르트의 f단조가,
그리고 그 이후의 f단조 작품들이
어쩌면 다른 어느 단조였더라도
우리가 받는 느낌에는
큰 상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글쎄,
이렇게 또 하나의 조성이
다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음악 듣기의 즐거움이
조금은 더 채워질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사족처럼 링크하는 곡은,
아델의 ⟨Hello⟩.
내가 이 곡을 좋아하는 것에 어쩌면
아주 조금쯤은,
원곡의 조성이 f단조라는 사실이
기여했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