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c#단조, “월광”, 1악장
어떻게, 수백 수천 개의
눈이 쳐다보고 귀를 기울이는데,
그렇게 대범하게 연주할 수 있는 걸까,
피아니스트들은.
이번에는 한번 제대로 녹음을 해보자,
마음을 먹고 카메라를 켤 때마다
무대 위에 오르는 연주자들이
대단해 보인다.
진짜 사람도 아니고,
그냥 눈 하나와 귀(마이크) 하나 달린
기계가 옆에서 ‘지켜볼’ 뿐인데도
나는 이렇게 벌벌 떨고
온몸의 근육이 굳어지는데.
나이가 들어 피아노를 배울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사십 대 후반에야 비로소 시작해
이제 5년 반을 피아노와 함께 한 나는
아마도 ‘동기 부여’라고 대답할 것 같다.
곁에서 응원해 주는 부모나 자녀들,
혹은 손주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인을 불러 모아 연주를 들려줄 만큼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라면,
어느 순간 문득 회의가 들 것이다—
‘내가 도대체 왜 이걸 하고 있는 거지?’
첫 한두 해는 하루하루 조금씩이나마
늘어가는 재미로 버티다가,
이윽고 모차르트나 바흐의
비교적 쉬운 작품들을 배우면서
나도 이걸 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스스로 감격해하다가,
그런데 어차피 맨날 혼자서 연주하고
나 자신 밖에 들을 사람이 없다면
과연 이 곡을 연주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싶어져서.
아마도 그것이,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내가
다시 카메라의 녹화버튼을 누르는
이유일 것이다.
연주하는 찰나 이미 소멸이 시작되는 게
음악의 근본적인 속성,
그러니 누군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 음악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도 같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연주를 하고 있는 나 자신조차
연주되고 있는 음악을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는 것.
연주하는 동안에는 악곡의 흐름에,
손가락의 움직임에 신경이 집중돼
전체적인 소리를 듣기 힘들고,
또 건반 앞에서 듣는 소리와
음향판과 리드(뚜껑) 사이에서 공명해
제3의 청자에게 들리는 소리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아노를 배운다면,
가끔씩 자신의 연주를 녹음해 보는 건
연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실력을 향상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들 한다).
새뮤얼 베케트 식으로 말하자면,
‘시도해 보고, 실패도 하고,
다시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더 나은 실패’를 위한,
여전히 엉망이지만 어제보다는 나은
내일을 위한 기록인 지도.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아니 어쩌면 사실은
딱히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나 같은
어설픈 아마추어라면,
한 작품에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 뒤
지난번 곡을 어떻게 쳤었는지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하고,
이윽고 두어 곡을 더 치다 보면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게 현실.
그러니 그저 기억하기 위해,
훗날의 언젠가 이 곡을 한때나마
그럭저럭 연주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기 위하여 녹음을 남기고,
누군가에게 내보이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은 연주이지만
굳이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