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화성/가락단음계와 딸림조, 그리고 ♯와 ♭의 함수 관계
J.S. 바흐의 ⟪인벤션⟫을 연주해 보았거나
음반이나 공연을 통해 접한 적이 있다면,
혹시 이런 의문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장단조 포함해 모두 24개의 조성 가운데
왜 15개만 사용했을까?”
⟪인벤션⟫의 목적은 악보 서문에 적힌 대로
바흐의 아들(들)과 학생들로 하여금
둘 또는 세 개의 성부로 구성된
대위법적 악곡을 다루는 능력과,
무엇보다 ‘칸타빌레’ 스타일의 연주를
익히기 위한 작품들의 모음집이다.
그러니 교육적 목적에 맞게끔
♯이나 ♭이 많은 조성은
당대의 연주 및 작곡 관습상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아서 뺀 것,
이라고 생각하고선 의문이 해소되었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해지자면 적어도 나는 그랬다,
f단조에 대한 글을 쓰기 전까지는.
⟪인벤션⟫에 빠진 조성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과 ♭의 개수에 따라 정리하면,
F♯장조, e♭단조 : ♭(또는♯)이 6개
B장조, g♯단조 : ♯이 5개
D♭장조, b♭단조 : ♭이 5개
c♯단조 : ♯이 4개
A♭장조 : ♭이 4개
f♯단조 : ♯이 3개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이나 ♭이 5~6개인 것은 그렇다 치고,
♭이 4개 붙는 f단조는 포함됐는데
그 나란한조 A♭장조는 빠졌고,
♯의 개수가 4개인 c♯단조와,
(f단조의 ♭ 개수보다도 적은)
3개인 f♯단조 역시 제외된 것은
어떤 까닭일까?
그러니 맨 처음의 질문은 사실
다음의 의문으로 대체해야 한다.
J.S. 바흐의 ⟪인벤션⟫에는
♯이 3개 붙는 조성인 f♯단조와
♯이 4개인 c♯단조,
♭이 4개인 A♭장조는 빠졌는데,
♭이 4개인 f단조는 도대체
왜 포함된 것일까?
어쩌면 별 걸 다 궁금해하는 것 같겠지만,
나름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들이
왜 어떤 조성은 사용하고,
또 어떤 조성은 기피했는가에 대한
어렴풋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내가 가진 기초 화성학 정도의
초보적 지식에 바탕해
가능한 추론을 해 본다.
(달리 말해, 전문적인 내용이 아니니
너무 진지하게 정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먼저 단음계부터 정리해 보자.
대단한 음악이론 수준이 아니라
중⋅고등학교 음악 수업에서나
또는 악기 등을 배울 때 알게 되는
기초적인 이론 수준이면 족하다.
단음계는 자연단음계 이외에
화성단음계, 가락단음계가 있다.
자연단음계는 조표에 바탕해
음들을 죽 늘어놓은 것인데,
가장 익숙한 C장조와 a단조로
음계를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오선지 없이
흔히 아는 도, 레, 미를 활용하자.)
C장조: 도–레–미–파–솔–라–시–도
a단조: 라–시–도–레–미–파–솔–라
화성단음계는 자연단음계에서
7번째 음이 으뜸음과 반음 차이인
‘이끔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또 그 결과로 ‘딸림화음'을 만들기 위해
7번째 음을 반음 높인 것이다.
a단조(화성): 라–시–도–레–미–파–솔♯–라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7번째 음만 반음 올리면
6번째 음(파)과 7번째 음(솔♯)의 차이가
온음(장2도)이 아니라
온음+반음(단3도)이 되어
음계를 연주할 경우
꽤 야릇한, 조성을 헷갈리게 하는
소리가 나게 되니,
아예 6번째 음도 반음을 올린 것이
가락단음계(상행)이다.
a단조(가락, 상행):
라–시–도–레–미–파♯–솔♯–라
다만 내려오는 선율에서는
이끔음(솔♯)의 기능이 필요가 없으므로
6음과 7음을 제자리로 돌리게 된다.
a단조(가락, 하행):
라–솔–파–미–레–도–시–라
여기까지는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일 것이다.
다음 단계로 더 나아가기 위해,
a단조가 아니라 c단조로
위의 단음계들을 다시 써보자.
c단조는 E♭의 나란한조이므로,
♭이 3개 붙는다. (시♭, 미♭, 라♭)
c단조(자연):
도–레–미♭–파–솔–라♭–시♭–도
c단조(화성):
도–레–미♭–파–솔–라♭–시–도
(7번째 음을 반음 올림)
c단조(가락):
도–레–미♭–파–솔–라–시–도
(6, 7번째 음을 반음 올림)
이렇게 써놓고 보면 눈에 띄는 것은,
아마 스케일 연습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의외로 c단조가 C장조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C장조에서 ‘미’를 ‘미♭’으로 대체하면,
가락단음계(상행)가 된다.
화성단음계 역시 ‘라’에만 ♭을
하나 더 추가하면 된다.
C장조:
도–레–미–파–솔–라–시–도
c단조(화성):
도–레–미♭–파–솔–라♭–시–도
더구나, 화성단음계를 보면
‘시♭’을 반음 올려 ‘시’가 되었으니
C장조와 c단조는
‘딸림화음’과 ‘딸림7화음’도 같다.
위에서 밑줄을 친 세 음을 모으면
다음과 같다.
G(딸림화음): 솔-시-레
G7(딸림7화음): 솔-시-레-파
곡 중간에 조를 바꾸는 데에는
대개 나름의 논리가 필요하다.
어색함 없이, 너무 튀지 않게
조바꿈을 하려면
중간과정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같은 으뜸음을 지닌 장조와 단조는
딸림화음 하나만 사용하고도
마치 마술처럼 바로
조바꿈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또 바로크 시대에는 기본조성이
단조인 곡이라 해도
마지막에는 장3화음으로 끝내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를 ‘피카르디 3도’,
피카르디 3도에 의한 종지라고 한다.
(물론 그 이후의 작곡가들도
가끔 사용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1악장에서
조성은 c단조이지만
종지는 C장조 화음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c단조는,
나란한조인 E♭장조만큼이나
C장조와 가까운,
때로는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는 관계에 놓여있다.
이제 위에 서술한 음계에 대한
설명을 적용해서
바흐의 ⟪인벤션⟫에서 ♭과 ♯이
4개 이하인데도 빠진 세 조성과,
f단조를 표기해 보자.
f♯단조:
파♯–솔–라–시–도♯–레♯–미–파♯ (♯3개)
c♯단조:
도♯–레♯–미–파♯–솔♯–라–시–도♯ (♯4개)
A♭장조:
라♭–시♭–도–레♭–미♭–파–솔–라♭ (♭4개)
f단조:
파–솔–라♭–시♭–도–레♭–미♭–파 (♭4개)
그런데 위의 단조들을
화성단음계로 표기하면,
f♯단조:
파♯–솔–라–시–도♯–레♯–미♯–파♯ (♯4개)
c♯단조:
도♯–레♯–미–파♯–솔♯–라–시♯–도♯ (♯5개)
f단조:
파–솔–라♭–시♭–도–레♭–미–파 (♭3개)
보시다시피 f♯단조와 c♯단조는
♯이 하나씩 늘었고,
f단조는 ♭이 하나 줄었다.
더 나아가 가락단음계(상행)로 써 보면,
f♯단조:
파♯–솔–라–시–도♯–레♯–미♯–파♯ (♯5개)
c♯단조:
도♯–레♯–미–파♯–솔♯–라–시♯–도♯ (♯6개)
f단조:
파–솔–라♭–시♭–도–레–미–파 (♭2개)
그렇다.
기본적으로 ♯방향의 단조들은
화성단음계나 가락단음계로 쓰면
♯이 오히려 늘어나 연주하기 까다로워지고,
♭ 방향의 단조들은 같은 경우
오히려 ♭이 줄어들면서
연주가 보다 용이해지는 경향이 생긴다.
더구나 앞에서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가락단음계에서 하행할 경우,
반음 올렸던 6, 7번째 음을 반드시
제자리로 내려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f단조 가락단음계의 경우 하행 시에,
f단조(가락단음계, 하행):
파–미♭–레♭–도–시♭–라♭–솔–파,
를 쓰는 대신에,
f단조(가락단음계, 상행의 역순):
파–미–레–도–시♭–라♭–솔–파,
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바흐는 ⟨2성 인벤션 f단조⟩에서
선율이 하행으로 움직일 때
이렇게 가락단음계 상행 시 사용한
음계를 그냥 쓰고 있다.
(다음 악보의 두 번째 마디 왼손과,
마지막 마디 오른손을 보자.)
그래서 처음 이 곡을 쳤을 때
어, 이게 뭐지, 이게 단조야 장조야,
도대체 무슨 화음을 쓴 거지, 싶었던 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f단조는 이제 ♭이 겨우 2개인 음계가 된다.
나아가 f단조와 긴밀한 관계에 놓인
같은으뜸음조 F장조는 ♭이 하나 붙으므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도
작품 안에서 두 조성을 연주하고
작곡하는 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같은으뜸음조인 A♭장조는 ♭이 4개,
그러므로 f단조 인벤션은 있는데
A♭장조 인벤션은 없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아주 조금만 더 나아가보자.
바로크 시대에,
그리고 그 이후 시대에도
조성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하기 전이라면
악곡을 구성하는 데 있어
기본조성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조성인
‘딸림조’를 살펴보자면,
아시다시피 딸림조는 조성의 근음에서
완전5도 위 음을 으뜸음으로 하는데
(예를 들어 C장조라면 G장조),
기본조성 으뜸음의 4번째 음이
딸림조의 7번째 음이 되며,
이를 딸림조의 으뜸음과 반음관계인
이끔음으로 만들려면
♯을 붙일 수밖에 없다.
C장조: 도–레–미–파–솔–라–시–도
G장조: 솔–라–시–도–레–미–파♯–솔
그러므로 f♯단조, c♯단조에서는
딸림조로 조바꿈을 하게 될 경우
♯이 추가로 하나씩 더 붙게 된다.
반면에 f단조의 딸림조는 c단조로
기본 조표는 ♭이 하나 줄어 3개이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화성단음계나
가락단음계에서는 ♭이 더 줄어든다.
f♯단조나 c♯단조는 기본 조표 이외에
1~2개씩 ♯이 더 붙어 연주해야 할 ♯이
5개 내지 6개, 혹은 곡의 전개에 따라
7개가 될 수도 있는 셈인 것이다.
♯이나 ♭이 많이 붙은,
특히 5개 이상 붙는 조성은
사실 평균율이 정착한 이후에야,
그것도 피아노 독주를 위한 작품에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금 단순화시켜 정리하자면
평균율 이전에는 조성에 따라
특정 음의 높이가 조금씩 달라졌고
반음 올리거나 내리는 것이
경우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이를테면 반음보다 살짝 더 올리거나
더 내리는 식으로 연주했는데,
그래야 조성 전체의 소리가
보다 조화롭게 들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바꿈이 그리 쉽지 않았고,
♯이나 ♭이 많을수록 당연히
연주의 난이도도 높아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해 보건대,
♭이 4개 붙는 f단조는
실용적으로 사용가능한 조성 중에서
가장 ♭이 많이 붙는 극단이 아니었을까.
(그 반대편에는 ♯이 4개 붙는
E장조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바흐는 ⟪인벤션⟫에 f단조를 넣고,
⟨하프시코드 협주곡 5번⟩, BWV 1056을
f단조로 썼으며,
페르골레시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이
⟨Stabat Mater (슬픔의 성모)⟩를
f단조로 작곡하는 등
상당히 자주, 지극한 슬픔의 조성으로
채택한 이유였을 수 있겠다.
지난 f단조에 대한 글에서 설명했듯,
당대인들이 이 조성의 기본 특징을
“깊은 절망, 망자를 떠올리는 슬픔,
비참과 고통에 찬 신음,
혹은 심지어 죽음을 향한 동경”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상이 비전문가로서 열심히 궁리해 본,
바흐의 ⟪인벤션⟫은 왜 15개의
조성으로만 작곡되었으며,
A♭장조, c♯단조와 f♯단조는 빠졌는데
f단조는 왜 포함되었을까에 대한
나름의 답변이 되겠다.
사실 다른 이유로 제외했을 수도 있다.
단순히 15개가 아름다워서일 수도,
혹은 내가 영원히 알 수 없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자연/화성/가락단음계와
♯과 ♭, 그리고 딸림음조의
어떤 비상한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흥미로운 계기였던 것 같다.
적어도 위의 추론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나의 피아노 선생님은
음, 말이 되는 것 같아요, 하셨으니
영 허튼소리는 아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한편으로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