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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im Sep 16. 2020

저항의 시대

Day 9

10대의 초중반을 전쟁과 같이 보냈다면

10대의 후반부는 다소 진정 국면이었다.

축구 예찬론과 크고 작은 사고 속에 빨리 철들었다고 해야 할까,

내가 해야 될 일에 대한 우선순위는 공부가 되었고

말 잘 듣고 모범적인 학생이고자 하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반장 두 번에 학생회장까지 했으니

공부+감투...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당시 내가 다닌 학교는 과거 10년 정도의 암흑기 동안 진학률도 좋지 않아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고등학교였고, 번화가와 인접해 있다 보니 이런저런 문제가 자주 발생했다. 학교 분위기가 그다지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꺼려하는 학생회장, 특히나 공부 좀 한다면 절대 권하지 않는 그런 직책이었던 것을 나는 왜 하려고 했을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나를 포함 학생들이 겪고 있는 학교 내에서 발생하는 부당한 일들을 해결하고 싶었다.

환경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저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급식문제를 건드렸다. 납부하는 가격에 걸맞지 않은 낮은 퀄리티의 급식은 '빨간 고기', '까만 고기' 등 비하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수백 평, 수백 명이 동시에 식사하는 급식소에 냉난방 시설이 없어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밥은 대충 먹고 바로 옆 매점에서 라면을 자주 사 먹게 되었고 급식소는 학생들의 식사를 위협하며 두 방향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일단 우리 지역의 각 학교 급식 가격과 품질이 어떤지 조사했고, 우리 학교가 결코 가격 면에서 싼 편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런 자료를 가지고 급식소 사장님과 담판을 지으러 갔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문전박대당했다. 당시 사학재단이었던 우리 학교는 바로 옆에 중학교, 실업계 여자 고등학교 등 함께 모여 있었고 당연히 같은 급식소를 이용했었다. 이런 사실을 역이용해 각 학교를 대표하는 학생들을 소집했고 합의 하에 불매 운동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학부모회에 요청하여 불시 급식소 순방을 부탁드렸고 '빨간 고기'와 '까만 고기'의 급식이 있는 그대로 공개되는 순간을 맞이했다. 거대한 급식소는 학생들의 불매 운동, 어머니회의 불시 단속 등 전방위적인 압박에 겁을 먹고는 백기 투항했다. 그렇게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공간을 충분히 채우는 냉난방기 설치, 학부모회와 협의 하에 수시로 품평회를 거쳐 급식의 퀄리티 조정하고 매점에서 한 회사 제품만 독점 판매하던 걸 개선하는 등 여러 가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두발 자유화를 이끌어냈다. 내가 다닌 학창 시절에는 항상 빡빡이였다. 8mm 이하의 머리 길이만을 허용했다. 당시 학교 안에 이발소가 있었는데 선택과 옵션 없이 바리깡으로 정해진 길이로 반강제적 이발을 당했었다. 머리는 왜 꼭 짧아야 할까? 한창 멋 부리고 싶은 나이에 빡빡이로 살아야 한다는 운명이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짧은 머리가 쓸데없는 일탈을 막아주고 공부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어준다는 논리였지만 당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부당하게만 들렸다. 오랜 역사 속에서 당연히 선배들도 그래 왔고 세월의 흔적처럼 쌓여 있는 고집들을 꺾는데, 설득하는데 걸린 시간은 거의 1년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도권의 학교들을 모델링했고 머리 길이와 진학 성적은 결코 반비례하지 않음을 통계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두발 자유화는 시대적 흐름이며 인권 문제로 까지 이어지는 중대 사안임을 인식시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루한 줄다리기 끝 결국 수능을 코 앞에 두고 나의 시간을 볼모로 성과를 얻을 수 있었고 우리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교복을 바꾸었다. 매일 아침 똑같은 옷을 입고 등교하는데 내가 입는 이 옷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면 단 하나의 옵션이 예뻤으면 했다. 무려 7가지 색이 포함된 부끄러운 디자인의 교복이었고, 이 옷을 입고 대중교통을 타면 어느 학교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식별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명찰은 교복 상의에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으로 딱 붙어 있어 어디를 가던지 발가 벗겨져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교복을 바꾸기 위해 역시 어머니회를 가장 먼저 설득했고 부모와 학생들의 일치된 공감과 의견을 가지고 학교 내 결정권자들과 협상할 수 있었다. 애교심과 자부심이 생길 수 있는 그런 교복, 누군가의 시선이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는 교복으로 만들기 위해 바꿨고 이 역시 내가 다닌 학창 시절에는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우리가 졸업하고 새로이 입학하는 후배들은 혜택을 보았다. 


결국 몇 가지로 압축해보자면 내가 다니고 있는 학창 시절에서 겪고 있는 불합리한 것들에 대한 작은 생각들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생각들을 하나씩 저항하면서 바꿔나갔던 것 같다. 그 대상은 제도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으며 학교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대다수의 결론에서 보면 기성세대의 우격다짐이었고 요즘 말로 하면 꼰대 마인드가 어린 우리들을 괴롭혔던 것 같다. 크게 세 가지의 이야기였지만 학생회장을 하는 1년 동안 수없이 많은 챌린지들이 있었고 때론 실패, 때론 성공하기도 하였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발견하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개선해나가는 과정의 연속이었고 그 과정이 수용이 아닌 저항의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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