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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와레몬나무 Aug 27. 2019

레몬나무에 꽃이피다

나는 리스본 근교 카스까이스(Cascais)에서 7 여년을 살았다. 남편의 직장때문에 그곳을 떠나 세투발(Setubal)로 이사갈때 주변에서는 시골마을로  옮기는 것을 걱정했다. 그렇지만 낯선 곳은 뜻밖에도 자유롭고 ,  크리스티나를 만났기때문에 외로운 줄 몰랐다. 그는 무척 친절했고 한국인 친구를 사귀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크리스티나는 남편과 딸 셋 그리고 멀리 마카오에 살고있는 아들 내외까지 sns로 인사시켜 주었다. 나는 남편과 딸만 소개하고 그곳을 떠날때까지 크리스티나에게 말하지 못한 한 가지 사실때문에 떳떳하지 못했다. 

나에게도 아들이 있었노라고. 





그는 열 여섯이 되던 해 돌아 올수 없는 여행을 떠났노라고 고백하지 못했다. 그 말이 뭐라고 내게는 대단히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아들이 떠난 지 여섯 해가 지났다. 

아들은 레몬나무에 꺼꾸로 매달려 한 팔은 나무를 잡고 다른 한 팔은 늘어뜨려서 흔들거리는 멍키테일 놀이를 좋아했다. 그를 추억하며 제주도 시집에  레몬나무를 두그루 심었다. 한 그루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지만 다른 한그루는 자리를 잡았다. 가까스레 살아남은 나무는 제주도의 추운 바람과 뜨거운 태양이 버거웠는지 몇 해 동안 꽃도 열매도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봄에는 자주색 레몬꽃 봉오리가 온 나무에 가득 맺혔다. 감격스러웠다. 나는 레몬 나무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나의 남편과 딸 그리고 나 자신을 달래는 위로였다. 



코메르시우광장과 테주강



소리내지 못하는 아픔, 슬픔, 그리고 통곡의 시간을 보냈다. 떠난 아들이 그리우면서도 남아있는 가족들의 삶이 삶이 아닌 것으로 만든 그를 원망하기도 했다. 아들이 떠난 뒤 남은 가족들은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예의를 차리고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어쩌다 감정선이 무너질때도 아들이 그립다는 말을 못하고  엉뚱한 변명과 핑계로 얼버무렸다. 

 레몬꽃 봉오리가 열리기까지 우리도 가까스레 버텼다. 그 사이 아들의 친구들은 입대와 전역을 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고등학생 또래의 남학생들이 지나가면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상실감은 애도와 자기 자신의 성찰 뒤에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  조문온 사람들의 의례적인 말,"가버린 자식은 얼른 잊는게 상책이다", "바쁘게 지내라", "아직 젊으니 아기 하나 더 낳아라"는 것은 위로가 아니다.  외상처럼 상처의 흔적은 없지만 상실감은 내면적인 상처이며 치유되어야만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동물과 이별, 사별, 특히 자식을 잃는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다. 아들이 떠남과 동시에 나는 가족, 친구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소식을 끊었다. 그들도 참척의 고통을 짐작이나 하듯이 연락하지 않았다. 아마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4.25다리와 크리스토 레이


 나는 그들의 바램과 달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어느날 포르투갈에서 갈리시아에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가는 길, 카미노 산티아고 포르투갈(Caminho Santiago de Português)을 알게 되면서 나는 새로운 나를 보게 되었다.

나는 길에서 철저하게 혼자였고 가슴속에 갇힌 분노와 슬픔을 보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끓어올라 울부짖었다. 포르투(Porto)에서 산티아고까지 270km, 리스본(Lisbon)에서 산티아고까지 내륙길 630km, 리스본에서 산티아고까지 해안길 670k를 걸었다. 비단 카미노 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나는 걸을때마다 의도하지 않은 카타르시스와 성찰,반성, 자유를 얻었다. 글을 썼다. 그냥 글이었다. 아무런 치장도 없고 맘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쓰기 시작했다. 걷기와 글쓰기가 거듭될수록 닫힌 문을 열고 조금씩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참척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참척은 어미와 아비로 또 한 인간으로서 견디기 무거웠다. 남편과 나는 아들이 떠난 2년 뒤에 나란히 암수술을 받게 되었다. 아들을 잃은 것이 내 인생에서 첫번째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면 이것은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아들을 앞세운 어미가 제 목숨 구하겠다가도 수술을 받는게 부끄러워 통곡했다. 그러나 나는 어쩔수없는 인간이었다. 참척의 슬픔보다는 나 자신의 생존이 우선이었다. 자식을 앞세운 어미로서 부끄러운 고백이다.

 딸애를 봐서라도 살아야하고 우리가 겪고 있는 상실감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또 하나의 상실감을 남편과 딸에게 더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박한 상황에서 의식의 밑바닥에서 '내가 없는 삶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는 생각은 또 하나의 죄책감이 되어 고통스러웠다.



알파마에서 본 그라사전망대

 


참척, 상실, 질병, 고통,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구원이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동안 무탈하게 큰 어려움 없이 살은 것은 나의 능력과 약간의 운(運)이 결합되어 의지대로 살았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허구였다. 동굴의 우상처럼 인생의 한 부분만 보고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렇지않고서야 생떼같은 자식을 잃고, 애미애비가 동시에 암선고를 받는게 말이 되는가! 나의 존재를 넘어서는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나의 가족이 모두 쓰러지지않는 이상 나는 한계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것 같았다. 마지막 남은 딸애라도 지키고 싶어서 나는 조금씩 신(神)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기적을 기도하지 않았다. 

병실에서 간절히 원했던 기적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세상의 수많은 인연 중에서 아들과 내가 만나서  16 년을 함께 지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산타엥그라시아교회와 도둑시장(FEIRA LADRA)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할 때 나는 사람들한테서 배움을 얻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청년시절 꿈을 생각하게 되었다. 남편은 아들이 떠난뒤,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가.아들이 주는 선물이야"라고 했다. 

"아들이 주는 선물"은  나에게 자유를 주는게 아니라 상실감 속에서 나를 진지하게 보고, 잊어버렸던 청년의 꿈을 되살린 것이다. 

 만약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슬픔이 있지만 타인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서 걸으면 어떨까. 걷기와 글쓰기는 오롯이 자신만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의도적인 자아성찰과 명상으로 끄집어 낼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이 봇물처럼 터지고 또 치유가 있다.

 걷기는 특별한 기술이나 장비가 필요없다.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되고, 쓰기도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자식과의 이별과 사별은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노력해서 잊혀질 문제가 아니다. 상실감은 저절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애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내면의 아픔, 상실감도 분명히 치료가 필요한 내상이지만 치료를 받기위해서 병원에 가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치료받지 않은 감정은 정신과 신체의 고통에도 영향을 미친다는게 현대의 심리학자들의 의견이다.  감정치료는 외국이 우리보다 적극적인 것 같다. 

 나의 친구 산드라(Sandra)부부는 반려묘를 키웠따. 그들의 반려묘가 죽었을 때 둘은 세상이 공허하고 의미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The art of living and dying"에서 위로를 받고 둘 부부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책에서 위로를 받은 것처럼 나는 걷기와 글쓰기였다. 



카사 비코스(CASA BICOS)와 사마라구 재단

 


셀수 없는 논밭길과 동네공원, 뒤산,  카미노 포르투갈길, 차마고도, 사파, 키나발루, 랑탕 등을 걷고 기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제는 괜찮겠지' 싶어도 무뎌진 감정이 다시 올라오고 6 년 전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 눈시울이 따가웠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하면 지나 온 모든 과정이 아들을 그리워하는 나만의 애도 방법이었다. 깊이 슬퍼하고 울지않았다면 처절한 고독과 안타까움을 그대로 방치해두었다면 나는 여전히 광야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때가 아들이 떠난 날이고 남은 세 식구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으로 다함께 모여서 아들이 떠난 날을 기렸다. 아직 서로의 고통을 드러내고 함께 말하지는 못해도 이만큼 버텨온 남편과 딸이 자랑스럽고 고맙다. 나의 고백을 읽는 가족과 독자들이 한계상황에 부딪힌 한 애미가 좌절에서 다시 일어 서기까지의 과정을 읽고 힘을 얻는다면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사웅조르제(S. JORGE)



포르투갈과 카미노 산티아고 포르투갈 길에서 찍은 사진을 쓰도록 허락해주신 

백곰폴 https://blog.naver.com/lpjt57 과 중국인 친구 Yimin Shen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제목의 레몬꽃은 구글이미지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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