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세를 찾는 일

운동이 가르쳐준 건 근육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위치를 아는 감각이었다.

by Byline Unknown

유튜브가 알려주지 않는 것


헬스장에 등록한 지 1년 반이 지났다. 매일 아침 출근 전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상적인 형태는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두세 번.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도, 식단을 지켜야 한다는 규율도 없다. 먹고 싶은 걸 먹고, 가고 싶을 때 간다. 그런데도 주말이 되면 자연스럽게 헬스장 쪽으로 발길이 향한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루틴이 생긴 거다.


처음에는 유튜브를 보고 따라했다. 화면 속 트레이너가 래터럴 레이즈 자세를 잡으면 그대로 거울 앞에 섰다. 옆 사람이 케이블 머신을 쓰는 각도를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설명대로 했는데 어깨가 아닌 목에 힘이 들어갔다. 무릎이 아파서 시작한 스쿼트가 오히려 무릎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정답인 자세가 내 몸에서는 오답이 되는 순간이 반복됐다.



몸이 먼저 아는 것들


고유감각이라는 게 있다. 눈을 감아도 팔이 어디에 있는지, 무릎이 몇 도로 굽어 있는지 아는 감각. 의학에서는 프로프리오셉션(proprioception)이라고 부른다. 시각이나 청각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작동하는, 몸이 자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내장된 지도 같은 것이다.


운동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자, 이 감각이 조금씩 살아났다. 래터럴 레이즈를 할 때 팔꿈치를 1센티미터 높이면 어깨 측면에 자극이 오고, 그 각도를 벗어나면 승모근이 개입한다는 걸 유튜브가 아니라 내 몸이 알려줬다. 스쿼트 발 너비를 어깨보다 살짝 넓히고 발끝을 15도쯤 벌리면 무릎 통증 없이 앉을 수 있다는 것도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몸이 찾아낸 답이었다.


메를로퐁티라는 철학자가 남긴 말이 떠오른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을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찾았다. 의식이 몸과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몸 자체가 세계를 지각하는 주체라고. 『지각의 현상학』에서 그가 풀어낸 이야기를 거칠게 줄이면 이렇다. 우리는 생각으로 세상을 알기 전에, 몸으로 먼저 안다.


헬스장에서 한 일이 정확히 그거였다. 머리로 이해한 자세를 버리고,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 어느 각도에서 자극이 오는지, 어디에서 통증이 시작되는지. 운동 영상의 자막이 아니라 관절과 근육의 언어를 읽는 법을 배운 거다.



정답이 아니라 내 답


결과는 조용히 나타났다. 만성적으로 아프던 무릎이 언제부턴가 조용해졌다. 오후만 되면 돌처럼 굳던 목과 어깨가 풀렸다. 체중은 약간 줄었고, 거울에 나름의 윤곽이 비친다.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런데 이 '드라마틱하지 않음'이 오히려 믿을 만하다. 극적인 전과 후 사진 같은 건 없지만, 1년 반 전의 몸과 지금의 몸이 같은 몸인데도 다르게 작동한다는 걸 나는 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에 대해 남긴 말이 있다. "대리석 안에 이미 형상이 있다. 나는 불필요한 것을 깎아낼 뿐이다." 밖에서 무언가를 붙이는 게 아니라, 이미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 운동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유튜브의 정답을 내 몸 위에 덧붙이려 했을 때는 잘 안 됐다. 내 몸이 원래 움직일 수 있는 방식을, 불필요한 힘과 잘못된 각도를 덜어내면서 찾아갔을 때 비로소 작동했다.


이 패턴이 운동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닌 것 같다. 플로리스트로 일할 때 꽃을 다루는 손의 힘 조절을 남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배울 수 없었다. 내 손 크기, 내 악력, 내 손가락의 감각으로 줄기를 잡는 각도를 직접 찾아야 했다. 광고대행사에서 콘텐츠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잘 되는 콘텐츠의 구조를 분석하고 따라 쓰면 평균은 나왔지만, 읽히는 글이 되려면 결국 자기 호흡에 맞는 문장의 길이와 리듬을 찾아야 했다. 개발자로 일하면서도 다르지 않다. 남의 코드를 읽고 패턴을 익히되, 결국 내 사고방식에 맞는 설계를 할 때 비로소 코드가 자연스러워진다.



자세라는 은유


이사도라 던컨은 발레의 틀을 거부한 무용가였다. 토슈즈를 벗고 맨발로 무대에 섰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다섯 개의 기본 자세 대신, 자기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방향을 따랐다. "사람을 춤추게 하는 건 기교가 아니라 영혼과 정신이다"라고 말한 사람. 그 시대에 그 말은 거의 이단이었을 텐데, 지금 돌아보면 그게 가장 상식적인 문장이다. 어떤 동작이든 내 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없다.


운동도 글쓰기도 일도, 결국 자세의 문제인 것 같다. 바깥에 있는 정답을 가져와 내 몸 위에 올려놓는 것과, 내 몸에서 출발해서 나에게 맞는 형태를 찾아가는 것. 둘은 겉보기엔 비슷한데 방향이 정반대다.



주말 아침, 헬스장으로


지난 주말도 헬스장에 갔다. 이어폰을 끼고 스쿼트 랙 앞에 섰다. 원판을 올리기 전에 빈 봉으로 먼저 몇 번 앉았다. 내 무릎이 오늘 어떤 상태인지, 고관절의 가동 범위가 어떤지 확인하는 시간. 영상도 보지 않고, 옆 사람을 따라하지도 않는다. 그냥 내 몸에 묻는다.


1년 반 전, 처음 헬스장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답을 밖에서 찾고 있었다. 유튜브에, 옆 사람에게, 인터넷 커뮤니티에. 지금은 안다. 답이 밖에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내 위치를 알고, 내 상태를 읽고, 거기서 출발하는 것. 운동이 가르쳐준 건 근력이 아니라 이 순서였다.


작가의 이전글기분은 날씨고, 감정은 지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