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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티영미 May 28. 2021

마을에서 나이들어 갈 수 있을까?

논문을 쓰다가 예전에 쓴 글을 만나다

     

  권여선의 소설, 『안녕, 주정뱅이』에 나오는 「봄밤」은 요양원으로 가는 세 자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놀랍도록 아프고 아름다운 이 글의 주 무대가 요양원이라는 사실은 작중 인물에게 닥칠 비극을 어느 정도 예감하게 한다. 이 소설뿐만 아니라 요즘 노인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수필의 주 무대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이다. 최근엔 지난해 사망한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들은 마지막 10년 간 요양병원·요양원에서 평균 614일(20.5개월)을 지낸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이제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런 일이 되어가고 있다. 내 아버지 역시 지금 요양원에 계신다.

  노인 복지에 관련된 일을 해서 그런지 요즘 들어 부쩍 노인, 건강, 돌봄 등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아직 노인이 되기에는 너무 젊기에 노인 문제는 나와 별 상관이 없을 것이고, 노인들은 별로 바뀌지 않을 것이고, 노인들은 그래도 선거권이 있기에 아이들보다는 살기 좋으며 다른 연령대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지 않나? 라고.

  막상 노인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현장에서 만난 노인들은 각종 통계수치가 3D 입체 현상으로 튀어나오는 형국이었다. 통계는 말한다. ‘유엔·국제노인인권단체 91개국 조사 결과 한국의 노인복지는 세계 91개국 가운데 67위로 '낙제 수준'이었고,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65위)과 우크라이나(66위)보다 낮고 도미니카공화국(68위)과 가나(69위)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라고 한다. 특히 소득 분야 복지는 밑바닥인데 기대수명 등을 포함한 건강 분야 지수의 경우 8위로 상위권에 속한다는 통계는 장수사회의 불행한 현실을 드러내준다. 즉, 돈은 없는데 수명은 너무 길어서 생의 남은 날들이 고통으로 얼룩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보고서는 "한국의 뛰어난 경제성장 수준을 고려할 때 노인복지지수가 OECD 국가는 물론 아시아권에서도 최하위권인 점은 놀랍다. 이는 국민연금이 비교적 늦게 도입되는 등의 이유로 노인층 빈곤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노인층 빈곤 해결이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에게 가장 큰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통계가 현실을 압축해서 보여준다고 가정할 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어가고 가난하게 오래 살고 일자리가 없어서 괴로운 노년 즉,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인들은 그래도 여성과 장애인, 아이들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이 나라는 가난한 아동, 가난한 여성, 부모세대보다 더 가난한 청년층, 가난한 노인을 양산하는 총체적 복지 사각 국가가 아닌가. 

  이러한 현상은 누가 더 가난한지 증명해야 하는 선별적 복지 관점에서 맥락 없이 덧붙여진 정책들 탓이 크다.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정말 이런 저런 복지 지원은 많은데 막상 쓸 만한 제도는 없다는 것이다. 피부로 체감되는 복지 정책이 아니다보니 수많은 제도들을 누리려면 숱한 장애물과 행정절차를 거쳐야 하고 이 과정에서 정보 습득 능력이 없거나 건강이 애매한 노인들은 술술 빠져나가게 되고 이들은 그저 몸이 더 아파서 작은 지원이라도 받을 때까지 방치되기 일쑤이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나는 때로 분노하고 수시로 절망하다 요즘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이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게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요양원이 아니라 평생 살던 곳에서, 평생 알아온 사람들과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 아플 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울어주는 사람들을 가진 그런 마을을 살아나게 하는 것. 그런 오래된 미래로 가야하지 않을까. 

  최근에 만났던 ‘연필 세 자루’는 이런 고민을 더 심화시켜주었다. 00동에서 의뢰한 90세 어르신은 딸의 소득이 경계를 살짝 넘는 바람에 수급자에서 탈락되었고 딸은 비용부담을 이유로 요양보호사 활동을 끊어버렸다. 그 집엔 장애인 활동보조인이 오기에는 장애등급이 약간 모자라는(그놈의 ‘등급’, 사람이 소도 아닌데 늘 복지대상자들에게는 등급이 주어진다.) 지적장애 손녀가 일종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딸 역시 70세가 다 되어가는 노인이고 먹고 살기 힘들어 겨우 두유나 기저귀 등만 가져다주는 선에서 보살피고 있었고 요양보호사가 오지 못한 지 4개월이 넘는 동안 지적 장애 손녀가 빨래와 식사 준비, 기저귀 갈기 등을 행하고 있었으니 집안에는 벌레와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주민 센터 담당자와 문을 여는 순간, 와락 달려든 냄새에 우리는 한동안 집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오물 냄새와 담배 냄새(할머니는 골초였다!)의 역습에 당황한 우리에게 지적 장애를 가진 왜소한 체구의 손녀(사실, 서른이 넘은 분임)는 엄청난 기세로 우리의 진입을 막았다. 그녀의 협상 조건은 단 하나, ‘연필 세 자루’였다. 연필 세 자루를 주기 전엔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였다. 감히 그 소중한 연필도 없이 방문한 우리는 진땀을 빼며 한참을 어르고 달래야 했다. 겨우 겨우 연필 없이도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받은 우리는 하나의 정물처럼 누워계신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간 우리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었다. 기저귀 체인지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었다. 손녀에게 일단 어르신의 기저귀를 갈도록 유도했고 때가 켜켜이 쌓인 할머니 옷을 갈아입히면 연필을 주겠다는 협상을 했고 할머니의 기초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의사 선생님께 왕진을 요청했다. 

  왕진 결과 황달과 영양부족으로 판명 나서 다음날 가정간호 선생님과 다시 방문했다. 그 사이 손녀는 새똥처럼 덕지덕지 앉아있던 머리의 비듬과 삐죽삐죽한 까치집 머리를 비교적 깔끔하게 잘랐고 빨래도 했다며 자랑했다. 여전히 연필 세 자루를 외치긴 했지만 어제보다는 저항의 강도가 다소 약해져 있었다. 그런데 영양제를 놓으려고 할머니에게 다가간 우리에게 어제보다 더 진한 냄새와 질펀한 부피감이 느껴졌다. 또다시 손녀를 얼러 가며 함께 기저귀를 갈았는데 어찌나 시간이 천천히 가던지,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는 상대성 원리(?)를 진하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기저귀와 오물이 묻은 할머니의 옷도 갈아입히는 등 최소한의 청결상태를 조성한 후에 앙상하게 마른 할머니께 영양제를 투여하고 그 과정에서 손녀가 혹여 링거를 빼는 등의 위험이 우려되어 주민 센터 직원들이 지켜보기로 했다. 이후에도 틈틈이 방문하여 할머니의 상태를 살피고 손녀에게 빨래와 기저귀 갈기를 잘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연필도 가끔 가져다주기도 했다. 일시요양서비스도 지원이 가능하기에 적합한 요양보호사를 물색하던 중에 할머니의 딸이 전화를 했다. 이제 어머니와 그 아이를 각각 시설에 보내기로 했다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마지막 인사였다.

  얼마 후 할머니와 손녀는 각각 요양시설과 장애인 시설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으론 일상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으니 시설에 들어가는 게 적절하겠다 싶다가도 더 적극적으로 지역사회 돌봄 체계가 구성되어 있었다면 이분들이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찜찜한 느낌 때문인지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어느새 내 귓가에는 이런 말이 들려온다. “연필 세 자루, 연필 줘, 연필 주세요.”

  이 사건이 일단락되던 즈음에 90세 할머니와 손녀 팀보다 더 강한 냄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집안 가득 퍼져있는 똥냄새였다. 앞으로 어르신 댁을 방문하려면 메르스에 버금가는 방역 수준의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이 할머니는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분이었다. 복지공무원이 방문했더니 상황이 너무 나빠져서 우리 팀에 긴급 SOS를 친 것이다. 급하게 연락받고 별 준비 없이 방문한 간호사가 어르신 댁에 갔더니 1주일 전만 해도 그리 심하지 않았던 할머니는 그 사이에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1주일여동안 방치한 똥들이 온 집안에 그득하였다. 그야말로 대변산성.

  주민 센터의 건장한 남자 직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방문간호사는 할머니의 상태를 판정하고 기본적인 청소만 겨우 한 후 응급으로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 사이에 센터 담당자는 딸이 외국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유일하게 국내에 거주하는 손녀의 연락처를 파악하여 급히 내려오도록 조치를 취했다. 할머니는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은 오지 말고 불도 켜지 말라는 요구를 하셨고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주장하셨다. 할머니를 겨우 달래가며 구급차에 태웠고 이 과정에서도 우리는 그 지독한 냄새에 시달려야 했다.

  할머니 댁에 다녀온 방문간호사들은 온 몸에 내려앉은 똥냄새의 습격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가 되었고 어두운 방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양말에 묻은 똥에 또 한 번 기겁하였다.  앞으로는 방문 간호 시 세탁비도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말을 하면서 극심한 냄새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였지만 결국 우리는 그날 점심을 먹지 못했다.(그런데 이 냄새보다 더 견디기 힘든 냄새도 마주치게 되었다. 약 1주일 뒤에 훅 들어온 냄새는 오물 냄새를 찜 쪄 먹는 이상한 비린내였다. 불결함과 아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어쩌면 냄새가 아닐까?)

  할머니가 입원하신 동안 청소 서비스를 통해 집안 대청소를 하려했으나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할머니 역시 시설로 들어가기로 결정된 것이다. 결국 할머니 집에 가득 찼던 똥냄새가 사라지는 것과 더불어 할머니 역시 이제 그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고령 노인의 대부분은 여성이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일방적으로 아내가 남편을 간호해야 하는 상황도 심각한 사안이다. 거리검진을 통해 만나게 된 노인 부부 역시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할머니는 노인 일자리를 나가야 겨우 입에 풀칠하는 형편이었고 치매진단을 받은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일할 동안 집에 감금되다 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할머니도 딱히 방법이 없고 할아버지는 이미 기본적인 대화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주민센터에 이 상황을 알리고 앞으로는 보건소와 주민센터와 협력하여 치매에 따른 지원 및 자원봉사자 연계 등을 통해 방임의 정도를 약화시키자고 결정하였다. 

  이런저런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그래도 이렇게 모여 살고 그나마 돌봄의 네트워크가 느슨하게라도 구성되어 있는 노인들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저 시골 벽지, 노인들만 남은 동네에서는 이런 돌봄의 손길도 가 닿지 않을텐데 그분들의 건강은 누가 책임지나. 오지랖 넓게 별 걱정을 다한다는 자괴감이 들 때, 나는 다시 한숨을 쉬며 생각한다. 

  나의 노년은 어떨까? 나는 그분들보다 형편이 나을까? 시설로 들어간 까닭에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할머니들은 거기에서 잘 살고 계실까? 과연 잘 산다는 게 뭘까? 낯선 사람들에게 건강이라는 이름의 관리를 받으며 정기적인 식사를 제공받고 오물처리를 대신 받으며 사는 삶. 그것으로 충분한가? 치매에 걸린 남편이지만, 일하는 동안에는 방치되어 있지만, 지역사회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살아갈 수 있는 그 노인 부부가 더 사는 것같이 사는 것은 아닐까? 

  시설이 아닌 집에서 생을 마감하려면 결국 ‘마을’이 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선진국에서 하고 있다는 방문 진료, 방문 재활, ‘Aging in place(내 집에서 나이 들기)’나 친구와 함께 살기(‘Aging with friends’)를 하려면 건강관리의 핵심 공간이 병원에서 지역사회로 이동해야 할 것이다. 

  “마을마다 노인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고 지역사회가 운영하는 건강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며 연명의료 대신 존엄사 문화를 안착시켜 나가고 사회적·정서적 평안도 요구되는 노년에 국가와 시장을 넘어 주민들이 서로 챙기는 마을 복지도 활성화”하는 등 대대적인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미 북유럽 등에서는 시니어들이 모여 살면서도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코하우징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방문 진료 등이 활성화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변화가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결코 쉬운 일도 아니겠지만 좀 더 인간답게 살고 싶은 마음들이 모아져 친구와 함께 사람 사는 동네에서 보내는 나의 노년은 지금보단 확실히 안녕할 것 같다. 아픈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을 눈에 보이지 않게 시설로 몰아넣지 않은 덕분에 눈만 뜨면 아프고 늙어가고 절뚝거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그런대로 보기 좋을 것 같다. 

  그 오래된 미래를 만들기 위해 나는 오늘도 골목을 누비며 아픈 노인들을 만날 것이다. 그들의 반복되는 지루한 레퍼토리도 격한 리-액션을 하며 들을 것이다. 먼저 노인이 된 그분들과 친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늙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오랜 운명에 저항하는 나만의 방식이자 나로부터 시작되는 마을 만들기의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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