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 가족의 일원, 딸로서
이제 서른이다. 여태껏 20대를 돌아보면, 대학생 시절에는 일주일 거의 내내 남친과 붙어 지냈고, 편입시험 준비기간에는 학교 도서관 근처에서 먹고 자면서 가족들과 더 볼 시간이 없었다.
직장인이 되고서도, 비록 집에서 통근을 했으나 대개 오전 9시~오후 7시의 상대적으로 긴 근무시간에 토요일 일요일까지 근무를 서기도 했고 저녁시간에 퇴근하고서도 근처 시외로 각종 모임을 하러 다닌다고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귀가시간은 오후 11시~12시. 드러누워서 바로 씻을 힘도 없었다.
'가족과 좀 얘기도 하고, 시간도 보내자'는 엄마의 말은 잔소리로만 들렸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오던 내가, 잔병치레를 하게 되고 또 코로나가 터지면서, 경영악화로 직장에서 잘리기도 하고, 질병으로 자발적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경우도 생기면서 자연스레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이런 지루한듯한 생활이 그저 따분하고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조금 차려입고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에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빨래와 설거지, 각종 집안일들은 오랫동안 신경을 안 쓴 지 오래였기에, 책임감도 옅어진 것 같았다. 그저 다 나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일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몸이 여기저기 아파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엄마와의 대화시간도 늘었다. 가족들이 음식이며 옷가지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직장에서 피를 잔뜩 쏟는 중에도 상사의 눈치를 보며, 응급실로 못 가던 순간에도 멀리서 와서 나를 병원에 데려간 사람들은 부모님이었다. 상사는 그런 '꼴'들이 보기 싫었는지 내가 가는 길에 밖을 내다보지도 않았다.(그게 그 직장에서의 마지막날이 되었다) 뭐, 원래 사회가 그런 것이다. 상사에게 그런 인정 따위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내 몸상태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튼 이어진 두 차례의 수술들과 회복기의 과정에도 여전히 가족들과 남친은 함께 해주었고, 경제적인 걱정보다는 내 건강 회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질적, 정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예민한 성격의 나를 잘 이해해주었고 보듬어주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니, 흔히 사람들이 병마와 싸우다 보면 진정 중요한 것들을 깨닫게 되는 여러 이야기들처럼, 나도 마찬가지로 삶에서 '내게 더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내가 돈으로, 노동으로 잘 보이려 했던 사람들의 인생에서 정작 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에게 한없이 '잘 보이려' 했던 내가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보다는 이런 와중에도 나를 아껴주고 걱정해주는 가족들과 남친이나 잘 챙겼어야 했는데...
아직도, 각종 '모임병'은 없어지진 않았다.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몇몇 모임에 가입하고서도 몇 달 동안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고, 새로운 일을 벌이고 싶어 한다.
그래도... 그런 모임들에 속한 사람들보다는, '나의 가족'들과도 함께 하는 시간을 일부러라도 챙겨 두려고 노력 중이다. 예를 들면, 오늘 같은 날씨 좋은 일요일에는 어디든 떠나고 싶고, 활동을 미뤄오고 있어서 운영진들의 눈치가 보이는 등산모임에 나가볼까 싶다가도, '아니, 직장인 동생도 쉬는 일요일이고 어제도 밖에서 놀다가 왔으니 오늘은 집에 있어보자'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가족끼리 소소하게 어디 가거나, 맛있는 것을 먹거나 할 수도 있고 굳이 무엇을 안 하더라도 그냥 '집에 같이 있는 시간', '삼시 세 끼를 머리 맞대고 같이 먹는 시간'이 나에겐 소중하다. 각자 방에서 저마다의 일을 하고 있더라도, 같은 공간 안에서 언제든 대화를 할 수 있는 서로가 존재하고 있는 느낌과 분위기가 좋다. 특히, 남동생한테는 그리 살갑지는 못하지만 엄마한테는 언제든 달려가서 치댈 수 있고(엄마는 귀찮아하지만) 내 맘 속의 이야기들도 종종 가볍게 털어놓을 수 있다.
아침부터, 사이렌이 울리듯 마치 엊그제 온종일 밖을 싸돌아다녀서 잠시 가정에 소홀했음에(?)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듯이 엄마한테, '엄마, 오늘 어디 갈까? 뭐하고 놀까?' 한참 앵앵거리고 있다. 엄마도 이런 소란스러움이 마냥 싫지는 않으신 듯, '몰라, 곰장어나 먹으러 갈까? 00(남동생)아, 오랜만에 누나 차 타고 놀러 갈까?'라고 하신다. 그 사이에 엄마가 만든 김치찌개가 완성되어가고, 나는 오렌지, 토마토, 배를 깎고 동생은 빨래를 넌다. 물론 쓸데없이 나의 목소리가 제일 크다. 내 방 창문으로 눈부신 햇살이 내리쬔다.
이제 아침 먹을 시간이다. 아, 아빠는? 며칠 전부터 시골에 가 계셔서 오늘의 여행이나 먹방은, 아빠한테는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