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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냥이 May 22. 2022

큰외삼촌과 외할머니

그리고 요양병원..

  엄마는 6남매 중의 막내시다. 엄마가 환갑이 넘으셨고 첫째 이모는 여든에 가까우시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제일 첫째인 큰외삼촌은 몇 년 전 돌아가셨다.

엊그제 엄마 형제자매 5명이서 청도의 셋째 이모 집서 모임을 가졌다. '밀양 박가'형제자매들은 3년 동안 다달이 일정 금액씩 부지런히 모아, '티끌모아 태산'을 이루었다.

그 돈은 아들딸의 결혼식 축의금으로, 손녀를 본 축하금으로 얼마씩 쓰이다가 드디어 돈을 부지런히 모아 오신 박가 형제자매 본인들이 만나서 노는 데 처음 쓰이는 것이었다.

  둘째 외삼촌은 서울에서, 첫째 둘째 이모는 각각 대구, 청도에서, 셋째 이모와 막둥이 엄마는 경남에서 사니 가장 연세가 있으신 큰 이모를 배려해서 중간 위치이기도 한, 청도에서 만남을 가졌다. 처음엔 엄마의 부탁에 청도의 펜션을 알아보았으나 사진상 괜찮아 보이는 곳은 40만 원 정도 거금이 들었다. 그럴 바엔 청도 이모에게 그 정도 돈을 드리고 이모한테 양해를 구하고 청도 이모집에서 하루 묵자는 데에 다들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게 엄마는 '차량 서비스 제공자, 아빠(박가네 식구 입장에선, 김서방)'와 함께 목~금요일 평일의 일정을 떠나셨고 직장인 남동생도 출근하고 나 홀로 집에 있으니 금세 가족들이 그리워졌다. 아침에 어수선했던 밥상 자리가 괜히 허전했다. 그래서 혼자 영화관도 가며 바람을 쐤는데 모든 일정을 마치고 갑자기 주차장에 앉아있을 때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큰외삼촌 생각이 났다.

  우스갯소리지만, 가끔 깜깜한 방이나 시골집에서 귀신이 나타날까 무서울 때마다 외할머니와 큰외삼촌한테 나를 지켜달라 기도한다. 내심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왠지 돌아가신 그분들이 내가 부르면 눈에 보이진 않아도 내 곁으로 와서 나를 지켜줄 거 같다.



  외할머니는 시골집에 홀로 계셨는데 아마 내가 초등학생 때  마당에서 넘어지신 이후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형제자매 중에 손꼽는 효자노릇을 하셨던 큰외삼촌이 청도에서 부산으로 외할머니를 모셔와서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어느 때부터 외삼촌도 몸이 성치 않으셔서 결국 요양원에 외할머니를 모셨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외할머니를 엄마가 모신 적도 있었는데 그때 엄마도 공장일을 한다고 바쁘셔서 집을 비우실 때가 많아 하교하고 나서 집에 와있던 내가 외할머니의 수발을 종종 들었다.

이제는 일부 기억만이 남아있는 그 시절이 어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회자될 때면, 나는 어린 나이에 외할머니 간병을 열심히 했다는 칭찬만 들었더랬다.

  하지만, 실제로 그때에 나는 외할머니의 편의를 생각하기보다 내 기분에 불친절하게 외할머니를 대할 때도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칭찬들에는 무안하고 가끔 때늦게 외할머니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외할머니는, 우리(나와 남동생)에게는 외할머니보다는 '청도할매'라고 더 많이 불렸다. 할머니 댁을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국도를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에 가파른 산길을 차로 굽이굽이 돌아가며 '청~도 할~매~~~'라고 나와 동생은 뒷좌석에 앉아 구슬픈(?) 노래를 한동안 불렀었다.


  외할머니의 임종은 지켜드리지 못했는데, 이 부분에서도 그 시절에 내가 도대체 뭐 그리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장례식마저 가지 못했는지 후회가 된다. 큰외삼촌의 장례식마저 함께 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알았는데 그때 나는 입원 중이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 시절 잠시 아팠던 나를 장례식 자리에 한동안 못 가게 하셨다.



  큰외삼촌은 이번 형제자매 모임에서도 그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할 정도로, 인자하시고 사람 좋은 분이셨다.

아빠랑 직장이 가까워 은퇴하시고도 한동안 가장 가깝게 지내셨기도 했을 거다.

  웬만한 대중교통도 잘 안 타셨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을 만큼 부지런하셨고, 이번에 모임에서 엄마가 이모들과 작은 외삼촌에게 들은 얘기로는 '시'도 참 잘 쓰셨다 했다.

아마 내가 알기론 독학을 해서 한자 자격증 1급을 따신 것으로 안다. 그것도 신문을 읽으며 한자 공부를 하셨던 것이다.

  큰외삼촌 자신의 가족관계는 뒤로 하고..

외삼촌이 요양병원에 계실 때 근처의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나는 가끔씩 외삼촌을 뵈러 갔었다.

할아버지들이 일렬로 누워계시는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병실에서..

외삼촌은 전에 없이 병약해져 계셨다. 자주 뵙진 못했지만 한 번씩 들를 적마다 상태가 안 좋아져 계셨다.


  아마 그 시절의 나는, 나 자신이 외롭거나 허전해서 외삼촌의 곁을 왔다 갔다 했었는지도 모르지만, 주위에 계신 할아버지들이, 그리 살갑지 않은 나를 딸이나 손녀로 종종 착각하시기도 했다.

슈퍼에서 두유나 요구르트를 챙겨가는 일도 외삼촌이 무엇을 드시기마저 힘든 상태에선 그만두었다.

약봉지에는 파킨슨병 약인 크기가 큰 엘도파 외의 알이 수어 개 들어있었는데 나중에는 가루로 나온 약도 드시기 힘들게 되셨고..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외삼촌을 뵀을 때는 사지가 침대에 묶여계셨다. 아마, 내가 외삼촌의 친딸이었으면 그런 모습에 조금 달리 반응했을 수도 있었을까, 그냥 도망쳐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외삼촌이 하셨던 말은, '(이 끈들을 자르게) 낫이나 칼을 가져다 달라'는 말이었고..

나는 난처한 웃음만 보여드릴 뿐이었다.

그곳의 얘기로는 외삼촌이 밤새 돌아다녀 낙상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24시간 내내 묶여계시는 외삼촌이 옛날부터 또 그동안 꽤 낯이 익으셨을지도 모르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하신 것은, 단지 모든 것들이 외삼촌 때문이 아니었다, 라는 생각은 무책임한 나에게도 그 누군가에게도 들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에 나마저 나 스스로를 잃어버렸고 우울증과 불면증에 휩싸인 온전하지 못한 정신과 몸으로, 외삼촌을 또 다른 병원에서 뵈었지만..

이전에 외삼촌께 드렸을지도 모르는 어떤 특별한 관심이나 위로마저 제대로 전해드리지 못하고..

그렇게 외삼촌은 떠나셨다.



  그런 그분들께 내가 고작 귀신이 무섭다고 염치없는 부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영혼이나 사후세계가 실재해서, 그들이 이제는 두 발 두 손 자유로이 어디든 그리운 곳 가고픈 곳 돌아다니실 수 있다면 가장 가까우셨던 두 분이서 가장 행복하고 신나게 그 모든 것을 누리시길 바란다.

  많이 늦었지만, 그분들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전하면서.

그들을 본받아 부지런히 삶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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