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꼼 나왔다 숨은 햇님

화장품을 바르고 하는 등산

by 박냥이

체감상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친 줄 알았던 비가 다시 내린다. 그사이에 비치는 햇살을 보며 오랜만에 산에 올라야겠다 마음먹고 아파트 근처에서 식수를 먼저 떠다 놓은 뒤 생각보다 쨍쨍한 햇살에 산에 가기 전, 선크림을 발랐다. 거의 다 써가지는지 잘 나오질 않아 꾹 눌렀더니 엄한 거울에 여러 방울이 튄다. 하나 새로 주문해야 하나.

백수라서 빠듯하게 느껴진다. 필요하다고 막 사면 씀씀이가 어느새 이만큼 커지더라.

얼마 전 생일에 받은 선쿠션으로 대충 마무리해본다. 어디 사람 만나러 나갈 때나 쓰려면 한참 묵혀둬야 할 듯해서 그냥 선크림 대용으로 가끔씩 써볼 예정이다.

등산스틱을 챙겨서 아파트 1층으로 내려오니 그사이 태양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흐린 하늘에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안경을 써서 자세히 보면 굳이 나가서 손을 대 보질 않아도 먼 거리에서 분간이 가능하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그대로 있다. 다시 집으로 가서 등산스틱과 등산모자를 벗어놓고 우산을 들고 나선다.

엘리베이터는 그새 1층에 가있다. 동네 산책을 할까, 했지만 흐린 날 산에 가는 또 다른 맛이 있을 거 같아 산으로 왔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할 만큼 비가 내린다.

나무속으로 들어온 지금, 우산을 막 접었다.

주말의 맑은 날에 비해 한적하다. 크게 공기를 들이켜본다.

새소리도 희미하게 들린다. 괜히 적적하여 한쪽 귀의 이어폰은 마저 빼질 않고 있다. 들리는 음악도 몽환적인 곡이다. 마치 지금의 장소와 분위기에 맞게 누군가 선곡해주는 느낌이다.


먹은 만큼은, 움직여야겠다. 날이 흐리다고 집에서 짐볼 위에서만 뒹굴기는 뭔가 갑갑하다. 아침을 다 먹은 지 서너 시간이 지나자 가짜 배고픔일 거 같은 허기가 몰려온다. 엄마의 잔소리와 함께 냉장고에 오래 박혀있던 떡볶이세트를 꺼낸다. 물과 떡을 넣고 양념, 야채 건더기를 다 넣고 처치곤란이었던 양배추에, 그냥 배추까지.

거기다가 우리 집에서 만든 고추장을 한 스푼 더한다.

한 스푼 이상 더하면 너무 매워지더라. 이번에는 살짝 매운데 먹을만하다. 거기에 간만에 싸게 구입한 딸기까지.

디저트 명목으로 작은 아이스크림도 먹고, 찬 걸 (참지 못하고) 먹은 게 염려스러워(건강 때문에 찬 음식을 줄이고 있는 상황) 어머니께서 끓여놓은 생강도라지 차도 바로 마신다.

생강의 세제맛(세제를 먹어보진 않았지만, 왠지 생강맛이 세제맛 같다고 생각한다)이 예전에는 꺼려졌으나 이제는 얼얼하면서도 상큼하게 느껴진다.


매일 다니는 익숙한 산길임에도, 그날그날의 날씨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고 그 속에 있는 나의 기분도 바뀐다.

오늘같이 흐린 날은, 왠지 늘 가던 장소에 가는 것도 살짝 두려워진다고 할까. 오랜만에 사람들이 없는 자신들의 터전에서 휴식을 취하던 멧돼지를 목격하는 상상도 해본다. 정면에서 우산을 펼치면 무서워한다고 예전에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다. 다행히 우산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웬만한 멧돼지보다 내 덩치가 더 크니 그들이 알아서 커다란 덩치의 움직임을 먼저 느끼고 피할 수도 있겠다.


평소에 화장을 잘하지 않는 내가 선쿠션까지 발랐으니, 번잡한 도시의 백화점에 가거나 낯선 이들과 카페 같은 곳에 가만 할 것 같이 느껴진다.

산속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는 지금엔, 그래도 선크림처럼 SPF와 PA수치가 있는 선쿠션이, 맑은 날 보다 흐린 날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자외선을, 비록 산속에서라도 막아줌으로써 어느 정도 자신의 몫을 해낼 거라 기대해보기도 한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같다가도, 그냥 지금 있는 장소가 더 편하고 익숙해서 그런 마음이 금방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접으면 등산스틱의 대체제로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우산은, 짧은 길이와 약하게 느껴지는 강도에 그저 주머니에 걸린 채 산길을 질질 끌고 있다.

듬성듬성 사람들이 보여, 맑은 날과는 반대로 나의 두려움을 조금 덜어주는 것 같다. 맑은 날의 산은 오히려 편안해서 홀로 산에 있는 것보다 마주치는 낯선 이들을 경계할 때가 더 많다.

지금 보이는 이는, 어린아이와 그와 같이 온 어른 한 명.

덕분에 한층 차분해지는 기분. 먼발치 보이는 그들의 존재로 쌀쌀한 산 공기가 조금 데워지는 것 같다. 때맞춰 가상의 DJ는 익숙하고 조용한 노래를 재생시켜준다.


산의 흙은 비를 맞아서 조금 어두워진 색깔이다.

사람들의 무수한 발길에, 나보다도 훨씬 알통이 많아진 길을 오른다. 이어서 나오는 돌길의 돌들은 모양도 위치도 제각각인데, 다 같이 모여서 돌길을 만들고 있다. 충분히 안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돌들 위에 발을 내딛는다.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오르막보다 내리막에서 더 주의할 점이다. 돌 사이에는 짓무른 나뭇잎들과 갈색 노란색 초록색 솔잎들이 뒤섞여 있다. 길가에는 솔방울이 떨어져 있다. 부러진 나뭇가지들도 보인다.

이제 볏짚이 깔린 급경사구간. 아직도 한 번에 오르긴 숨이 차다. 비교적 야트막한 나의 등산코스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다행히 끝에 벤치가 있어서 항상 여기 앉아 숨을 돌린다.

아이의 떼에 지쳤는지 뒤에 오던 아이와 어른은 보이지 않는다. 며칠 전에 왔을 때보다 군데군데 보이는 진달래가 더 많이 피었다.


산에 자주 오지 않으면, 오랜만에 혼자 오는 산은 적막하고 무섭다. 그래도 산속에서 30분, 1시간, 2시간 머물다 보면 조금씩 편안해진다. 저 멀리 맑은 연파랑 하늘이 보인다.

내려오는 사람들의 라디오 소리도 같이 지나간다.

저 사람도 나처럼 우산을 들고 있다. 파란 우산.

나는 무지개색 우산.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아까보다 더 크게 들린다.

이제 거의 오후 4시가 다 되었다. 햇님의 얼굴도 별로 오래 못 봤는데 곧 저녁이라니. 조금 아쉬운 하루다.

꼼꼼하게 채워 온 물병의 물을, 맑은 날의 등산 때와는 달리 아직까지 손대지 않고 있는 것은 산속의 수분을 공기로 마셔서인듯하다. 제 할 일을 잃은 우산은 계속해서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찍는다. 날이 흐리면 몸이 처지는지, 평소보다 더 밍기적거리며 산을 오르고 있다. 산속의 공기도 차갑다. 그나마 따듯하게 껴입고 와서 다행이다.


이후 내려오는 길, 뒤에 출발한 어무니와 합류.

다시 되돌아온 장소에는 다시금 얼굴을 비친 햇님덕에 또 다른 장관이 펼쳐진다.

벌써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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