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09] 혼자가 좋은 강릉 봄 여행 : DAY 4, 하나
이 여행기는 2021년 3월 말에 떠났던 것으로, 현재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행지는 강릉을 중심으로 차로 1시간 내 이동할 수 있는 많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방역과 지역별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여행하였습니다.
어~! 어어어어~!
눈을 비비며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난 아침,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조심스레 열어젖힌 창문 밖에는 오늘의 또 다른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일몰이나 일출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에겐, 완벽한 태양의 자태를 보는 건 3대가 덕을 쌓아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완벽한 태양의 자태에 대해선 각자의 해석이 조금씩 틀리겠지만, 정확히 수평선에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어 바다 위 물결에 정확히 반사되는 그런 형태를 대부분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바다 위 안개나 구름이 완벽히 사라져야만 가능한 모습이기에 매일 그런 멋진 풍경을 선사해 주는 건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고 더더군다나 한정된 시간만을 가진 나 같은 여행객들에게는 그런 경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자 행운일 것이다.
오늘 아무런 기대 없이 본능으로 맞이한 아침 해돋이는 이제껏 동해바다에서 본 그 어떤 일출보다 아름답고 완벽에 가까웠다.
오늘도 참 시작이 좋네, 멋지다!
아침부터 비몽사몽으로 맞이한 예정 없던 감동의 시간이 지나고, 현실로 돌아온 나는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던지고 잠을 청했다.
'밥 먹자!'
얼마가 지났는지 늘어지게 늦잠을 잔 나를 깨운 건, 친구의 전화였다. 친구는 자세한 설명과 함께 꽤 여러 가지 선택지를 나에게 줬는데, 그중에 난 '타이 음식점'을 Pick 했다. 아니 왜 강릉까지 와서 타이 음식을 먹느냐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여행지에서 꼭 지역색에 맞춘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지역의 특색을 담은 훌륭한 맛집을 제일 선호하긴 하지만, 맛집에 가는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 볼 때, 음식점의 위치가 어디에 있건 음식의 맛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닐까?
어쨌든, 이곳 '스왓띠(Sawasdee)'는 강릉에서 맛볼 수 있는 이젠 너무나도 유명해져 버린 전통 타이 음식점이다. 친구는 이곳을 '태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오게 된 며느리가 요리하는 태국의 가정식 집밥 음식점'이라고 했다.
태국인 셰프가 직접 만드는 정갈한 집밥 음식이라, 이걸 어떻게 마다할 수 있을까?
가게 입구로 들어서면 생활용품, 식재료를 파는 슈퍼마켓과 음식점이 보이고, 이를 같이 운영하시는 듯했다. 그리고 하나도 꾸미지 않은, 아주 옛날 놀러 갔던 친척 시골집 방과 같은 식당 모습과 인테리어에서 난 직감했다.
우와 여기 진짜 내 스타일인데?
내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구가 나를 보며 빙긋이 웃는다.
우린 솜땀, 팟타이, 똠얌 국수를 시켰다. 이건 뭐 맛뿐만 아니라 접시를 가득 메우는 푸짐한 양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했다. 진짜 태국의 어느 가정집에 초대받아 대접받는 소박하고도 깔끔한 정통의 맛이랄까? 특유의 태국 향신료를 아끼지 않은 것도 맘에 들었다. 한국인에게 맞추는 타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리 타국으로 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태국 며느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음식에서 묻어나는 것 같아 마음이 찡해지기도 했다. 우린 순식간에 음식을 비워 나갔다. 아마 배속에 여력이 좀 더 있었다면 더 많은 음식을 주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음식을 먹으면서 서서히 불러오던 배가 아쉬웠다.
만족스런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우린 친구 지인이 하는 카페 'LOVE LETTER'(참고로 2022년 카페는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로 이동했는데 카페가 위치한 남항진은 나도 강릉에서 처음 와본 곳이었다. 강릉에서 근래 가장 유명한 해변을 꼽으라면 아마 맛있는 커피 베이커리의 성지인 '안목해변'을 떠올릴 것이다.
한참 성수기 때는 이 안목해변의 거리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아마 이곳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에게는 보다 차분하고도 한적한 곳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항상 북적거림이 좋은 것만은 아니잖나..
안목해변과 직선으로는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이지만 강릉 남대천과 바다가 가로막아 차를 타고는 한참 돌아와야만 올 수 있는 곳, 여기 남항진이 바로 현지인들이 자주 오는 그런 곳이라 한다.
2022년 현재 러브레터는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혹시 방문하시려고 생각했던 분들은 참고하세요. 소식을 댓글로 알려주신 황주성님 감사드립니다.
아담한 남항진 해변에 위치한 이곳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를 시키고, 야외 테라스에 앉아 한적한 해변을 바라보며 어제 못다한 친구와 수다를 떠니 더할 것이 없었다.
나도 그렇게 강릉의 현지인이 된 듯했다.
친구와 헤어진 나는, 허난설헌 생가를 방문했다. 나는 양천 허씨이다. 예전보다 씨족 사회의 강한 결속이나 소속감이 없어진 요즘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나에게는 내 성씨가 주는 묘한 자부심이 있다.
조선 말기 돈으로 양반이나 족보를 사던 시절, 이미 씨족 사회의 그 근원이 다 뒤틀려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복잡한 옛날 역사이야기를 들먹여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엔 허무해 지기만 한다. 그냥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자기만족으로 즐겁게 살면 그만 일 테니 너무 으시대지도, 너무 나무라지도 말자.
어쨌든 내 성씨에 대해 작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나는, 여행지에서 관련 성씨나 뿌리의 흔적을 찾게 되는 곳을 발견하게 되면 시간을 내어 꼭 방문하려고 꽤나 노력하는 편이다.
'우리 집안이 왕년에 진짜 잘 나갔어' 뭐 이런 삼류스러운 수준 낮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와 깊은 관계를 가진 내 조상들은 이렇게 멋지게 살았구나'라는 친밀한 유대감과 내 존재를 느끼고 싶어서일 것이다.
허난설헌 생가터는 오래된 고택이 선사해 주는 전통적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널찍한 마당과 그 안에 네모나게 지어진 본채로 구성되어 있는 이곳은 곳간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갈리는 구조로 이를 사이로 내외를 구분하고 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허난설헌은 안타깝게도 27세에 요절한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8세 때부터 천재적인 시재를 발휘한 그녀는 섬세한 필치로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달래는 노래를 했는데 허난설헌이 죽은 후 동생 허균이 작품 일부를 모아 ''난설헌집''을 간행했다고 한다.
그녀는 예술적 천재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기하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 여성을 비하했던 당시 암울했던 유교문화, 시부모의 천대 그리고 갑작스러운 부모와 자식들의 죽음 등으로 참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녀가 지은 시들은 그녀의 성격이나 담대함을 알 수 있는 멋진 것들이 아주 많은데, 한 번은 남편과 친구들이 서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친구 하나가 남편이 기생집에서 여색에 빠져 놀고 있다고 장난을 쳤다고 한다.
그녀는 그때 술과 안주를 보내면서 이런 시를 지어 같이 전달했다고 한다.
"낭군자시무심자, 동접하인종반간 (郎君自是無心者,同接何人縱半間)"
이는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 길레 이간질을 시키는가.'라고 했던 것이다. 편지를 읽은 남편의 친구들은 그녀의 글재주에 탄복했다 한다.(위키백과 참조)
그녀는 '조선 최고의 걸 크러쉬'이자 예술가였던 것이다.
허난설헌 생가를 나와보면 바로 허난설헌 소나무 숲길이 우리를 맞이한다. 초봄에만 볼 수 있는 만개한 벚꽃과 너무나도 큰 키에 한번 더 놀라는 소나무가 잘 어우러진 이 길은 강릉의 또 다른 명소인 경포호까지 이어지니,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허난설헌의 비극적 삶과 천재적이였던 그녀의 예술혼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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