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13] 혼자가 좋은 강릉 봄 여행 :DAY 6, 하나
이 여행기는 2021년 3월 말에 떠났던 것으로, 현재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행지는 강릉을 중심으로 차로 1시간 내 이동할 수 있는 많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방역과 지역별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여행하였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이제야 강릉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는 게 실감 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서운한 맘을 감출 새도 없이, 아직 정리 못한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보니 '아.. 언제 짐을 싸냐..' 한숨부터 나왔다.
대충 씻는 둥 마는 둥, 얼굴에 묻은 눈곱을 떼어내고 창문 밖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맛있고 진한 커피 한잔이 간절했다.
강릉이 일명 '커피의 성지'가 된 이유에 대해서 저마다 여러 가지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심에 '박이추' 바리스타가 있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아직까지 활동하는 유일한 1세대 바리스타이시기도 하고, 그 유명한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를 강릉에 개업하여 아직까지 직접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시는...
일본 규슈에서 태어난 박이추 바리스타는 1988년 혜화동에서 처음 커피점을 시작했는데, 한국이 너무 좋았었던지 1997년에 한국으로 귀화했으며, 2000년 강원도로 내려와 2004년 지금의 자리에 본점을 개업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 본점을 방문하고 싶었으나 이곳은 주문진 근처에 있어서 강릉시내에서 왕복하기는 좀 애매한 시간과 거리였다. 하지만 충분히 진하고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는 '박이추 커피공장'이 그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어 이곳을 방문하기로 맘먹었다. 생각을 더듬어 보면 예전에도 본점을 가려다 이곳으로 일종의 '타협'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세월이 묻어나는 본점의 방문은
다음번 여행으로 또 미뤄야지 뭐..
물론 더 가까운 경포호 근처에도 보헤미안 경포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멋진 바다와 함께한 예전의 추억도 소환할 겸, 특히 후각을 미친 듯이 자극하는 로스팅 커피내음이 가득했던 이곳이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십여분 주문진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강릉으로부터 해안선을 달리다 보면, 길 옆에 보이는 모던한 건물이 눈에 띄는데, 이곳이 박이추 커피공장이다. 여기 커피공장은 카페와 실제 커피를 로스팅하는 곳을 관람할 수 있는 공장이 붙어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방문한 날은 아쉽게도 관람이 허용되지 않았다.
카페에 들어서면 우선 자리로 안내하고, 잠시 앉아 기다리다 보면, 직원분께서 직접 자리로 오셔서 주문을 받는 좀 특이한 오더 방식인데 처음엔 좀 뭔가 어색했었다. 물론 지금은 오래된 단골인 것처럼 능숙하게 행동할 수 있지만...
나는 보헤미안 블렌드 한잔과 실패가 없는 몽블랑을 시키고 멀리 카페 앞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오랜만에 맛보는 박이추 커피는 적당한 산미가 여전히 매력적이어서 예전 추억을 아른하게 생각나게도 했고, 오전부터 허전했던 맘을 편안하게 달래주기도 했다.
그래.. 역시 명불허전이란 말은
이런데 쓰는 거였어.
30여 년이 넘도록 이국 땅에서 맛있는 커피를 알리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늙은 바리스타의 단단하고도 묵직한 향이 커피에 그득한 것만 같았다.
박이추 커피의 향기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쯤, 어김없이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디야? 점심 뭐 먹을래?"
"나 박이추 아저씨 커피 먹으러 왔어"
"본점까지 간 거야?"
"아니 커피공장, 맨날 여기로 타협하네 ㅎㅎ"
"야 너도 대단하다, 아침부터 거길 갔냐? ㅎㅎ"
역시 친구는 내 맘을 잘 아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점심은 그냥 친구에게 정하라 했다. 어제 삼숙이탕 사건 후 나는 친구의 말을 아주아주 잘 듣기로 굳게 결심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관광지가 아니라서 외지 사람들이 생각만큼은 잘 없는, 현지 사람들이 해장이나 한 끼 별식을 위해 자주 가는 '안목 바다식당'으로 나를 안내했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멋스러운 기와집을 개조해 만든 이 식당은 강릉 주변 주민들의 소울푸드라 칭하는 '장칼국수'와 메밀전 2개의 음식만을 팔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계절마다 추가되는 메뉴들이 있다는 것이다.
동절기(10월~4월)에는 떡만두국, 만두국, 칼만두 이렇게 3개의 메뉴를, 하절기(5월~9월)에는 냉콩국수를 추가해서 판매하고 있다.
이곳도 기본적으로 최소 몇십 분 이상은 대기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운 좋게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익은 배추김치를 얇게 부쳐낸 메밀전은 아삭한 김치의 맛이 삼삼한 메밀 반죽과 어울려 식전 입맛을 돋구는데 충분했고 쫄깃한 면발이 씹는 재미를 더해주던 굵은 칼국수는 특유의 비법 장맛과 함께 꽤 매콤하고도 묵직한 칼칼함을 전달해 준다. 면발 사이로 칼국수의 고명과 국물 맛을 내게 해주는 표고버섯과 호박 그리고 감자의 조화로운 조합도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난 매운걸 잘 못 먹는 맵찔이지만, 흐르는 땀을 연신 닦으며, 그 큰 한 그릇을 다 비울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장칼국수라는 음식 자체가 먹을 때는 엄청 맵고 짠 느낌이지만, 뒤돌아서면 자꾸 생각나고 계속 먹고 싶고... 그런 음식이 아닌가?
'장'으로 맛을 낸 장칼국수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향토 음식으로
이들 지역 주민의 소울푸드라고도 한다.
강원도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고추장의 들어가는 비율에 달라져서 그 맛이나 스타일이 꽤 달라진다고 하는데, 이곳 안목 바다식당의 칼국수는 전통의 맛이 강렬했던 장칼국수의 기본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식사로 강원도의 소울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장칼국수'를 추천한 친구의 사려깊음이 더더욱 멋져보인 뜻깊은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친구와 따뜻한 커피 한잔을 하고 싶어서 우린 근처 남항진으로 이동해 자주 갔던 지인의 카페에 들어섰다. 커피를 시키고 어제 갔던 박물관과 음식점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와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그래 이놈이랑 같이 사진 찍은 게 언제더라...' 기억도 안 났다.
"야~! 저 앞에 바다 가서 사진이나 함 찍자"
"뭘 낯간지럽게... 아니다.. 찍자~!"
친구도 이렇게 날 보내긴 서운했던지 순수히 따라나섰다. 우린 꽤 바람이 매섭게 불었던 남항진 해변가로 다가가 눈이 아플 정도로 파랬던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 또 언제 보냐?"
"언제든 와"
"담엔 니가 서울 와"
"알았어 임마"
"잘 지내 임마! 건강하고"
"알았어 운전 조심하고 임마"
우린 잠시 서로 힘껏 끌어안아 서로의 등을 몇번씩 두드리고 난 뒤, 쿨하게 헤어졌다.
그렇게 강릉의 마지막은
바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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