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불식간에 눈물이 솟아나는 순간에는 늘 기억이 따라왔다. 집에서 짧은 설 연휴를 지낸 뒤 휠체어를 타고 병원으로 돌아가시던 쓸쓸한 뒷모습으로 시작된 기억. 그 기억은 비디오테이프처럼 앞으로 되감기를 시도하다가 특정 장면마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채 머물러 있곤 했다. 마음의 준비라는 말이 의사의 입 밖으로 나오던 순간부터 아버님과 연관된 추억은 업데이트를 멈췄다. 자꾸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이유일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일시 정지된 장면들이 지나치게 낡고 흐릿하다는 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으로 편집된 심상은 아닌지, 과연 온전한 사실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자주 꺼내보아야 추억도 명징해진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것이 쓰는 이유다. 아무리 현재를 바삐 살아간다 해도, 더 낡고 희미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 부디 내가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서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더 이상 소실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러므로 꺼내 보이는 기억의 조각들.
"작은 애기한테 밍크코트를 못해줘서 어쩌냐. 꼭 해주기로 했는데."
"아버님. 괜찮아요. 제주도에서 밍크코트 입고 나갈 데도 없어요. 온난화 때문에 겨울에 롱패딩도 더워요."
"아니, 그래도 내가 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마음으로 감사히 받을게요."
소심한 며느리는 정 그렇게 주고 싶으시다면 현금으로 주세요란 발칙한 소망을 개구지게 뱉어볼까 하다가 이내 할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기운 없이 옅은 미소를 짓는 아버님의 눈빛 위로 언뜻 미안함이 내비쳤기 때문이다. 미안함을 안도감으로 바꿔드리고 싶었다.
"아버님, 결혼할 때 사주신 명품 지갑 있잖아요. 그거 저 아직도 잘 쓰고 있어요. 명품이 좋긴 한가 봐요."
"아니, 글쎄. 그때도 가방으로 사라니까 너무 작은 걸 샀어."
"어유, 어디 들고나갈 데도 없어요. 전 지갑이 실용적이고 좋아요."
아버님은 로망이 있었다. 며느리가 들어오면 반드시 밍크코트와 명품백을 해주리라. 누가 그렇게 해야 훌륭한 시아버지가 되는 거라고 채근한 것도 아닌데 아버님은 자신의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월 어머님으로부터 받는 용돈의 일부를 저축하셨다.
남편이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맞벌이를 해온 시부모님은 돈 관리에 있어 계산이 정확했다. 주된 수입 관리는 어머님이 하고 아버님은 용돈을 받는 체계를 공고히 다져놓고 이를 성실히 이행했다. 돈 쓰임새를 공용과 개인용으로 구분 짓고 이따금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애매모호한 지출을 정산하다가 옥신각신 다투시곤 했는데, 이따금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달까. 말이 다툼이지, 항상 받아내려고 필사적인 건 아버님이고 어머님은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벽을 세우다가 마지막엔 못 이기는 척 결국 아버님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흡사 남편과 나의 모습 같았다.
시댁 안방에 걸린 달력 속 빈 칸에는 매월 자잘한 글씨들이 새까맣게 쓰였다. 궁금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다.
가스 충전비 -50,000원
드라이 값 -13,000원
쌀 5kg -28,000원
김 씨 아들 결혼식 -20만 원
성당 봉헌금 -5만 원
공금이 쓰여야 했지만 어머님이 안 계실 때라 어쩔 수 없이 아버님의 지갑에서 나가야 했던 지출을 빼곡히 기록해 놓은 것이다. 야무진 아버님은 허투루 넘어가는 법 하나 없이 어머님께 따박따박 돈을 받아냈다. 그렇게 알뜰살뜰히 용돈을 사수하는 양반이시니 백화점에 밍크코트를 사러 가자는 말씀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엥? 밍크코트라뇨. 결혼 전부터 며느리들에게 명품백과 밍크코트를 해줄 것이라 누누이 장담하셨던 아버님의 약속을 까먹진 않았다. 그 약속 덕분에 형님은 명품 가방을, 나는 명품 지갑을 손에 넣었으니까.
수완이 좋다는 여타 사람들처럼 부동산과 주식투자로 요행수를 누리면서 자산을 불린 것도 아니고 오로지 근면 성실과 근검절약으로 지금의 안정된 살림을 이루신 걸 알고 있었다. 각자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며느리들이 시부모님이 응당 누려도 마땅할 것에 안 쓰고 모은 천금 같은 돈으로 사치를 부린다는 건 언감생심일 것이다.
결혼식 전에 혼수로 명품백을 안겨주겠다는 시부모님과 함께 백화점에 들어설 때도 그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나름 패션 업계에서 일을 해본 터라 명품백의 등급과 시세를 가늠하고 있었다. 형님이 받았다는 가방을 보니까 흔쾌히 사더라도 부담 없는 가격대가 대략 얼마일지 감이 왔다. 옷장 깊숙한 곳에 더스트 백에 싸여 상전처럼 모셔질 가방을 택할 것이냐, 매일 한 몸처럼 붙어 다닐 실용성을 택할 것이냐. 나는 실용성을 택했다. 그리고 그때 선택한 지갑은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명품값 본전 이상으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밍크코트는 기억 속에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밍크코트를 실물로 몸에 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따뜻했다. 그만큼 며느리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으셨구나. 실재하지 않는 밍크코트는 시아버지가 표현하고 싶은 며느리 사랑의 표징이었다. 실존하지만 자주 잊어버리고 살았던, 영원한 줄로만 알았던 그 사랑 말이다. 양가죽의 모서리가 해져서 슬슬 벗겨지기 시작한 지갑을 쉽사리 바꾸지 못하는 이유도 아버님의 사랑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터놓고 말하자면,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가 아니기에 친밀감을 표현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며느리일 뿐이니까 이 정도로 해두자는 생각이 지배했었다. 자식들 이상으로, 형님 이상으로 막내며느리가 나서서 챙기기에는 과하지 않나라는 검열이 마음 속에 자리했으므로 적당히 하자. 너무 애쓰지 말자가 모토였다. '시'자가 붙으면 으레 그런 거라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그러니까 나도 남들만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후회스럽다. 내 시아버지가 남다른 사람이고, 내가 받은 사랑이 남달랐는데 뭘 그리 애정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조차 평균에 맞추려고 애를 썼나. 딱 그만큼만 하자고 선을 그어버린, 딱 고만고만한 마음씀씀이를 반성했다.
병세가 악화돼서 다시 입원하기로 결정했을 때 편지를 써서 드렸다. 섬망이 찾아오기 전 정신이 온전하실 때 존경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용기 내어 입 밖에 꺼내보았다. 모두 그때가 아니면 앞으로 영영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편지를 읽으셨고, "나도 사랑한다."는 화답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일도 남편은 비행기를 타고 아버님께로 간다. 매번 힘주어 말한다. 아빠 원 없이 보고 와. 매일 나빠지니까 오늘이 최고로 나은 상태란 것을 잊지마. 오늘의 아버지 모습을 잘 담고 오기를.
그렇게 우리는 매일 아버님과 작별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