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9일 오전 1시 22분, 아버님과 영원한 이별을 했습니다.
섬망 증세로 인해 놓쳐버린 아버님의 기억 조각을 저라도 흩어지지 않도록 잘 그러모아 당신의 존엄을 지켜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글의 초고를 완성한 뒤 누워서 잠을 청하던 자정 무렵이었어요. 남편과 저는 바다 건너 제주에서 전화로 임종을 전해 들었습니다. 시어머님이 긴급히 임종실로 향하고 있다는 전화를 들은 지 40여분 만이었습니다. 불과 3일 전까지 아버님 곁을 지켰다가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머리를 움켜쥐며 말했습니다. 3일만 더 같이 있을걸 그랬어...... 하지만 압니다. 의사의 선고를 받고 마음의 준비를 거듭했다 하더라도 모든 순간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아버님의 부재를 묵묵히 감당할 뿐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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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앞으로 아이들 볼 날이 몇 번이 되겠습니까. 한 80번 되려나. 지금 일 년에 네 번 정도 보니까, 이십 년을 더 산다고 치면 80번. 잘해야 80번 정도 보겠네요."
아버님은 우리 식구가 시댁에서 명절을 보낸 후 친정으로 넘어갈 때마다 운전해서 데려다주시곤 했다. 힘들게 안 그러셔도 된다고 손사래는 쳤지만 감사히 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제주서부터 끌고 온 캐리어와 어머님이 손수 담그신 된장, 과일, 떡, 거기다 손 꼭 붙들고 다녀야 하는 어린아이까지 생각하면 태워주신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시댁과 친정이 같은 지역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시아버지를 수고롭게 하는 거 아닐까 조금은 부담됐던 그 시간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님에게는 아들 내외와 손주를 일분일초라도 더 볼 수 있는 기회였던 거 같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친정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 까무룩 하게 잊고 지내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니 기억나나. 너희 식구들 우리 집에 데려다주실 때, 사돈어른이 그렇게 싫다고 마다 하는 거를 아빠가 차라도 한 잔 대접해야 한다고 집 안에 모시고 올라왔잖아. 그때 이런 말씀하시데. 아이들 한 80번 밖에 못 본다고."
떠올랐다. 아버님이 암 진단을 받기 전 건강하시던 때였다. 양가 부모님이 찻 상을 가운데 놓고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시던 모습, 예의와 배려와 진지함이 무겁게 내려앉은 집안 공기, 그 속에서 불필요하게 K-장녀의 리더십을 발휘한답시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끌어내려고 진땀 빼던 나. 당시엔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 시부모님을 얼른 차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은 바람만 간절했다. 며느리는 한 귀로 듣고 사뿐히 흘려 들었던 시아버지의 말씀을 친정 엄마는 인상 깊게 저장해두고 있었다.
그래 맞아, 제주에 사는 아들 식구가 설, 추석, 명절을 제외하고는 어버이날이나 생신 즈음에야 겨우 부산에 들르니까 일 년에 네 번이 맞지. 그 얘기를 하시던 때가 환갑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멀리 20년을 내다보고 80번의 만남을 계산한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다 채우지 못한 채 작별을 고한 우리로서는 80번이란, 이제 가슴 시리게 아쉬운 숫자가 되어버렸지만. 아버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 여행도 못 다녀봤으니까. 서로의 집을 오가며 회포만 풀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콧 끝이 시큰해지는 충격이었다. 중년에 접어든 아들 내외를 '아이들'이라고 칭한 것도 먹먹했고 그보다 충격인 건 따로 있었다. 마냥 영원하리라 여기고 별스럽지 않게 흘려보낸 만남 속에 아버님은 미리 셈을 하고 계셨나 보다. 자식들과의 만남이 결국엔 유한한 숫자에 그칠 것을, 다음을 기약하지 못할 때가 올 것임을, 언젠가는 영원한 이별로 종결짓게 될 날이 오리라는 걸.
그러자 아버님이 주신 사랑의 면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게 됐다. 아, 그래서 그러셨던 거구나.
명절 한 달 전쯤부터 손녀가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를 반복해서 물어보시던 얼굴, 아이가 좋다고 한 딸기와 망고를 박스 채로 사다 놓으시던 일, 명절 내내 다 먹지 못할 만큼 넘쳐나서 바리바리 싸주시던 음식들, 그렇게 내어주고도 못 해준 것이 떠올랐다며 아쉬워하시던 통화까지.
80번의 만남을 셈하고 계셨던 아버님을 떠올리자 비로소 납득이 갔다. 섭섭했지만 말도 못 꺼낸 채 속앓이 했던 일 마저. 3년 전, 모처럼 제주에 놀러 오신 시아버지는 해외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주버님 집에서 추석을 지내자고 하셨다. 추석은 형님 댁, 설은 제주도 우리 집. 장시간 먼 거리를 떨어져 지낸 아들 형제와 손주들이 서로 우애를 확인하고 결속을 다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다.
'그럼 난 친정을 언제 가지?'
아버님의 계획을 듣자마자 대뜸 들었던 생각이었다. 직장 다니는 며느리가 육지에 친정 식구들을 만날 시간내는 것이 명절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힘들다는 걸 왜 몰라주시지? 이토록 중요한 결정에 내 의견은 전혀 궁금하지 않는 걸까?
시댁에서 서열을 따지자면 제일 꼴찌인 내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왠지 말하기를 체념하고 잔뜩 삐져있는 것만이 막내며느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 같았다. 분명 기분 좋은 날이어야 하는데. 항암치료를 마치신 시아버지를 모시고 풍광 좋은 송악산 둘레길을 걷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 기분은 온통 섭섭함에 사로잡혀 우중충했다. 그간 얼굴 보고 못다 한 얘기를 털어놓기에도 모자란 시간이건만, 오리주둥이처럼 입을 댓 발 내밀고는 누가 봐도 삐졌으니까 제발 좀 알아달라고 시위하듯이 침묵했다. 정답게 곁에 붙어서 걷기에도 시간이 아까웠을 텐데, 멀찍이 외딴섬처럼 떨어져서 걷는 철딱서니, 그게 나였다.
결국 아버님의 바람은 형님의 반대로 힘없이 유야무야 돼버렸지만 그때 내 입장을 고려해주지 않았던 아버님께 서운함이 티끌만큼 남아있었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을 것이라는 씁쓸함을 매일 마주해야 하는 아버님의 입장에서 미처 헤아려보지 못했다. 형님처럼 나도 조곤조곤 의견을 말했다면 분명 잘 이해해 주셨을 분인데, 왜 그랬을까. 참 어렸다. 마흔인데도 미성숙한 대처를 한 스스로를 탓했다.
올해 설날이 아버님과 보내는 마지막 명절이 되어버렸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었지만 해도 해도 끊이지 않는 얘깃거리와 웃음소리가 식탁을 가득 메웠다. 사촌지간인 두 손주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서먹함보다는 다감함을 주고받으며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들 형제와 며느리들, 손주들, 그리고 아내를 차례차례 돌아보며 미소를 지으시던 아버님은 원이 풀리셨을까.
더 일찍, 자주, 이런 풍경을 선사해 드릴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