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25일 차
매주 일요일마다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만드는 미술 수업을 듣는 중이다. 오늘은 대형 캔버스에 나뭇잎, 솔방울, 나뭇가지, 들꽃 등 자연물을 사용해 <마음>이란 주제로 그림을 완성했다. 자연물을 붓 삼아 그리고, 손바닥으로 찍어보고, 아크릴물감을 툭툭 흩뿌려도 되는, 딱 한 시간 제약 없이 표현의 자유가 허락된 시간. 아이의 키보다 조금 모자랄 뿐인 커다란 백지는 티 없이 깨끗한 눈 밭에 발자국을 찍고 싶은 충동과 엇비슷한 의욕을 일렁이게 했다. 마치 출산하고 일을 시작한 뒤로 쭉 마음 놓고 분출할 수 없었던 비정형과 무계획성이 꿈틀대는 듯이. 본래의 나는 시간으로 사치를 부리고 싶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고사리 잎에 물감을 발라 마스킹테이프로 고정시켜 놓은 캔버스 테두리를 액자처럼 둘러싸듯 균일하게 문양을 찍어댔다. 지켜보던 나로서는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한 답답함이 들어 내키지 않았지만 협동 작품이므로 군말 없이 직사각형 틀 만들기를 도왔다. 그렇게 고사리 문양 액자를 다 완성하고 나니 가운데에 또다시 채워가야 할 직사각의 공백이 남게 됐다.
이번에는 정말 두서없이, 무모하게 그려보고 싶었다.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빈 곳을 메워갔다. 아이는 자기 팔뚝만큼 두툼한 나뭇가지 끝에 흰색, 파란색 물감을 묻혀 붓처럼 이용했다. 나는 선생님에게 배운 대로 약간의 물을 섞은 아크릴 물감을 툭, 투둑 손목의 까딱임으로 흩뿌렸다. 공백은 점점 덩치를 줄여 여백이 되어갔다. 그럴듯한 작품으로 변모하는 캔버스를 보며 성취감이 고양됨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일정한 배열 없이 자유롭게 표현해 주길 바라는 엄마의 욕심이 커졌다. 꼼꼼하게 아래쪽부터 채워나가는 아이의 차분함을 그냥 지나치질 못 할 정도로.
"너무 규칙적으로 안 해도 돼. 여기 한복판에 자유롭게 그려봐."
"엄마, 나는 규칙적인 게 마음이 편해. 이게 자유롭게 하는 거야."
웃음기가 사라지고 입을 삐죽거리는 아이의 대답에 더 하고 싶었던 훈수를 삼켰다.
'규칙 속에 안정을 느끼는 성향을 깜빡하고 엄마는 또 너답지 못한 것을 요구했구나'
올해 어린이날, 아이는 보건복지부장관이 수여하는 모범어린이상을 받았다. 남편은 자그마치 장관상이라며 어깨가 한동안 내려오지 않았지만 걱정 부자인 엄마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아이는 상을 바란 게 아니라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동했을 뿐인데, 괜히 과한 의미부여를 하면 아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할 거 같았다.
아이는 학기 초 반장을 하면서 한동안 잠을 쉽게 못 이룰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수업시간에 떠들지 말라는데 떠드는 친구들,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데 뛰는 친구들, 사이좋게 지내라는 데 싸우는 친구들. 반장이라는 책임감과 규범적인 성향이 친구들을 통제하려는 태도로 드러났다. 매일밤 친구들이 제 말을 듣지 않아서 학교에 가기 싫다며 힘든 점을 털어놓는 아이의 고민을 들으면서 걱정이 되었다. 새 학기는 한창 같은 반 친구들을 알아가고 사귀어야 할 시기인데 아이가 홀로 외로워지는 거 아닐까. 까다롭고 간섭이 많은 친구로 여겨지는 건 아닐까.
다행히 이를 알아차리신 담임 선생님의 섬세한 지도와 배려 덕분에 지금은 해맑은 장난꾸러기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부담감을 내려놓고 반 친구들과 조화롭게 지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사정이 있으니 축하할 만한 경사에도 걱정부터 앞세우는 나의 노파심이 과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아이의 기질 탓을 하기에는 남편과 내가 너무 그렇게 키웠다. 우리 부부는 계획이 틀어지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규율을 중시하는 양가 부모님의 영향으로 아이에게 역시나 다르지 않게 가르쳐왔다. 공감육아가 대세인 시절을 거쳐왔기에 아이의 마음 읽기를 소홀히 여기진 않았지만, 통제적인 남편과 나는 기준에 어긋나는 것만큼은 엄격하게 지적했다.
어느 날 아빠, 엄마의 기준이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마시는 것, 과일을 손으로 집어먹는 것, 옷에 물감을 묻히는 것, 놀이터의 모래를 만지는 것. 모든 걸 엄마의 허락을 구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규범과 허용의 균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아이를 재운 늦은 밤, 남편과 나는 육아 방향에 대하여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별 이견없이 합의를 보았다. 앞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간섭이나, 잔소리를 하지 말자고 말이다.
첫째, 신체를 다치게 하는 위험한 행동
둘째, 공중도덕을 어기거나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칠만한 행동
셋째, 인사와 식사 습관 등 기본적인 예의범절
세 가지라고 기준을 세웠지만 상황이란 것이 칼로 무 자르듯이 딱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판단하기 애매모호한 상황 속에서 아이의 자율성을 어디까지 허용해 줄 것인가, 매 순간이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규칙을 중시하는 부모 아래서 순응하도록 키워놓고선 때에 따라 자유롭지 못하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참으로 모순된 엄마가 아닐 수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데. 아이는 부모의 성향을 닮아, 그리고 그렇게 배웠기에, 절제된 규범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 나답지 못함을 강요하면 내적으로 거센 반발심이 일어나듯 아이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탓에 거부감을 표현하는 강도가 약할 뿐, 언제 코뿔소처럼 부모의 의견을 들이받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릴 적 내가 부모가 그래주길 간절히 바랐던 것처럼, 나다움과 너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법을 육아를 통해 배워간다. 육아는 아이뿐만 아니라 나라는 인간 역시 키워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이 덕분에 내 말과 행동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니 말이다.
오늘의 너다움은 캔버스 속에 액자를 만들고 그 아래부터 차곡차곡 채워가는 것이었다. 비록 양육자가 중심이 되어 완성하는 그림 작품이었지만 아이에게 '자유롭게'를 거듭 강조하던 스스로가 마음에 걸렸다. 너답게 너의 색깔을 잃지 않고 자랄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추구미는 현실과 달라서 추구미인가 보다.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으련다. 글쓰기를 통해 나다움을 찾아가듯 너다움을 인정하는 연습 또한 쭉 진행형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