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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로 명상하기

100일 글쓰기 26일 차

by 뵤뵤


"엄마, 무릎도 안 좋은데 108배 그만하면 안 되나?"

"어휴, 살려고 하는 기다. 살려고."


친정아버지가 꾸리던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던 때였다. 식구들의 아침상을 차려놓고 하루가 멀다 하게 108배를 하기 위해 절에 다녔던 엄마. 아무리 좋아서 한다 해도 매일은 무릎 건강에 무리지 싶어 만류하던 나에게 108배는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고 하셨다. 감정을 쏟아낼 줄만 알았지 잠잠히 가라앉히는 법을 몰랐던 20대 시절,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름표를 붙일 수 없는 사소하고 애매모호한 감정에서부터, 공허함, 적적함, 비교에서 오는 시기심과 열등감, 그리고 짜증, 분노 같은 원색적인 감정까지. 마음 그릇이 온통 흘러넘치는 날이면 엎질러진 가슴속 언어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종종 기분이 태도가 되어 괜스레 모난 돌처럼 굴었던 것이다.

현재 느끼는 감정을 말과 글로 선명하게 표현할 수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김종원, <나의 현재만이 나의 유일한 진실이다> p21.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탓해본들, 말로 불평불만을 쏟아낸들, 부정적인 감정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늘 찌꺼기가 남았다. 그걸 흔히들 뒤끝이라고 부르는데 나의 뒤끝은 쿨하지 못하고 끈질긴 편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했던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이전에 해소되지 못한 잔재들이 덩달아 끌어올려졌고 그렇게 살을 덧붙여 몸집이 커진 감정의 회오리는 당초보다 거세어진 돌풍을 일으키곤 했다. 하루 중에 다섯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나도 한 가지 나쁜 일에 감정이 매몰되기 십상인 예민함이 자꾸만 나를 괴롭혔으므로, 명상과 마음 챙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이에게 부모로서 금수저를 물려주긴 힘들 테지만 '긍정적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와 회복탄력성' 같은 무형의 자산만은 꼭 물려주고 싶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변치 않는 가치를 가슴에 새기고 단단한 마음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스스로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다스리는 법을 체화한다면 건강한 자립의 토대를 마련하는 길이 아닐까. 하지만 부모가 실천하지 못한 것을 아이에게 바랄 순 없다. 감정의 수렴과 발산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것은 어른인 나에게도 꽤 어려운 과제이므로 차근차근 반복된 연습이 필요한 거 같다.


그래서 요즘 나는 필사를 통해 마음을 다스린다. 종일 키보드와 터치패드 위에서 놀리던 손가락으로 오랜만에 펜을 쥐고 손글씨를 써보는 건 그 자체로 온 신경을 하나로 모으게 하니까. 대충 갈겨쓰기에만 익숙해져 약해진 손가락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단 하나의 획도 흘려 쓰지 않겠다는 결의. 기왕이면 예쁘게 따라 쓰고 싶은 욕심이 더해져 뒷장까지 자국이 남을 정도로 꾹꾹 눌러쓰는 정성. 따라 쓰는 속도에 맞춰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고 곱씹어보는 집중력까지. 도무지 잡다한 상념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들숨과 날숨에 집중해서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는 명상과 닮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친정엄마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그야말로 속 시끄러운 날에 필사의 덕을 톡톡히 다. 며칠 전만 해도 꾹 눌러왔던 울화가 눈치 없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 한 시간 가까이 분노의 필사로 마음을 다스렸으니까. 펜을 쥔 손가락에 힘이 빠져 경련이 일 정도였지만 신기하게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잔잔히 가라앉았다. 필사가 어머니의 108배와 같은 역할을 해준 셈이다. 기분이 나아지는 방법을 하나 추가하게 되어 뿌듯하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시름을 잊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으나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진 탓에 화려한 영상을 받아들이기조차 벅찬 때 그런 순간을 위해서 내 가방은 앞으로도 계속 무거울 예정이다. 언제 어디서든 펼칠 수 있는 필사책과 펜은 한 몸인 거처럼 떨어뜨려 놓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처음으로 완주한 필사책





2025. 10. 27

자랑삼을 수 없겠지만 11개월 만에 필사책
한 권을 끝냈다.
출퇴근 가방이 무겁게 매일 넣고 다녔는데 매일 쓰지는 못했다.
어떤 날은 시간이 없어서,
어떤 날은 쓸 기분이 아니라서,
어떤 날은 펜을 손에 쥐기엔 너무 피곤하니까.
필사를 하지 못한 날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요즘은 쓰지 못할 이유 중 하나를 지워가고 있다.
쓸 기분이 아니라도 쓴다.
필사에만 집중하느라 여느 잡념들이 무용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기분 관리에 도움을 받고 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한 나의 첫 필사책.
마법의 문제해결책처럼 불쑥 펼친 페이지가 그날의 기분을 어루만지고 해답을 줬다.
덕분에 잘 위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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