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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phapha Jan 01. 2020

암세포는 무사합니다.

12월 31일, 2019년의 마지막 날을 병원 정기진료로 마무리했다.

2년 전 크리스마스가 하루 지난날, 갑상선 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새해가 되자마자 수술대 위에 누웠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매년 크리스마스의 악몽으로 남았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망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감사했다.

호기롭게 파이팅을 외치고 들어갔지만, 생각보다 길어진 수술시간에 지쳤는지 나오자마자 신음과 함께 전부 토해버렸다.

반절제 예정이었으나 눈을 떠보니 나는 갑상선 전체가 사라지고, 몇 개의 임파선에게도 안녕을 고하게 된, 만 서른일곱의 여자가 되어있었다.

암 판정을 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더 이상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었다.

수술 후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몇몇의 후기를 읽고 나니 벙어리가 된 내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피검사도 초음파 검사도 깨끗하세요. 6개월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아 올해도 무사했다!'라는 마음에 기분이 매우 좋아진다.

갑상선암은 다른 암들에 비해 완치율이 높아 착한 암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암이 안 걸려본 사람들이 말하는 또 하나의 병명일 뿐이다.

생존율에 따라 몇 개로 나누어진 갑상선 암을 모두 다 착한 암으로 치부해버리면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사망한 사람들이 억울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희망적인 유두암이지만, 암은 암이다.

내 몸 어딘가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암세포들이 내 컨디션이나 내가 먹는 음식에 따라 크고 작아질 거라는 불안한 생각이 들면 스트레스에도 조금 관대 해지지만 반대로 먹는 것에는 매번 큰 후회를 하게 된다.

다이어트한다고 눈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다 먹고 후회하는 것과는 다른 기분으로 살아간다.




갑상선이 전부 없는 여자로 다시 생활하면서 처음에는 위로랍시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지인들에게 정이 떨어져 버렸다.

"갑상선암? 그거 감기 같은 거야"

"야 그거 암도 아니래"

"갑상선암은 착한 암이라잖아. 걱정하지 마"

"어머 나 아는 동생도 얼마 전에 불치병 걸린 줄 알았잖아"

어쨌든 그들이 내게 한 이야기는 심각하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은 알겠으나 그들을 이해하기보다는 내가 위로받고 싶었던 말이 아녔음을 인정하고 나니 그들과 나의 얕은 관계도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저 분위기 전환용 농담이었거나 나에게 희망을 주려는 말을 하기가 낯간지러웠던 성격을 가진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계기로 가벼운 관계를 부정하고 싶었던, 혹은 그렇게라도 끌고 가고 싶었던 관계를 정리해버렸다.




시어머니는 내가 암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전화로 눈물을 흘리셨다.

당시 어머님도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셨는데, 당신이 당신 얘기만 나에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하시며 수화기 건너로 한 동안 울음을 토해내셨다.

반대로 우리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침착했다.

아니 처음엔 시댁에 이야기하지 말라는 얘기를 듣고 당황스러워서 내가 다 눈물이 났다.

"왜 얘기하면 안 돼? 암 걸린 여자 반품한대? 내가 암 걸리고 싶어서 걸렸어? 왜 말하지 말래? 내가 죄졌냐고!"

예상한대로 우리 엄마의 눈물은 매우 희귀했다. 끝내 볼 수 없었다.

모성애라면 둘째가라도 서러운 사람인데 내면은 강철 로봇처럼 강한 여자라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게 엄마라는 걸 아니까 울지 않아서 고마웠다. 울면 내가 더 쓰렸겠지.

나도 엄마 같은 여자로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참 유난스럽다.

겨우 갑상선암 가지고.

그런데 검진을 기다리는 며칠 전이나 일상에서 피곤함을 느끼면 심리적으로 잘 진정이 되지 않는다.

열린 결말을 가진 영화처럼, 간혹 내가 전이가 되어 있는 상상을 하거나 재발하면 어쩌지 하는 염려들이 떠올라 머리를 흔든다.

암세포는 이미 떼어냈지만 처음부터 암이 없었던 사람들과는 달리 암이나 전이, 재발 같은 키워드를 검색할 일이 생긴 것, 생리 전 후에 가슴이 찌릿해져 오면 유방암을 걱정하게 되거나 불규칙한 내 식생활에 짜증이나 갑자기 예민해지기도 한다.

갑상선암 대신 불안암을 얻은 거다.




수술 2년 차의 나는 이제 수술 자국에도 매우 관대해지고, 평생 먹어야 한다는 약은 비타민이라 생각하며 즐겁게 먹는다.

사소한 일은 그냥 사소하게 넘겨버리고, 큰일이 생기더라도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가족들에게는 조금 더 따뜻한 말과 잦은 안부를 묻는다.

이왕이면 건강한 음식을 선택하고, 내가 정한 가벼운 루틴 안에서 충실하게 살려고 결심한다.

내일을 기대하며 눕는 저녁을 사랑하고, 눈을 떠 일상을 생활하는 시간들에 감사하며 보낸다.

매일을 풍성한 마음으로 살며 사람과 사물의 따스함을 찾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지낸다.

암세포가 내 안에 있든 말든 나는 나대로 살고, 암세포는 그저 내 안에 무사히 잠자고 있길 바란다.

올해도 나는 살아있는 나로 산다.





@byphap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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