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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phapha Jan 05. 2020

사랑이란 숲에서 계속 길을 잃어줘

연애 예능 몰입자의 독백


마지막 회를 기다리기 전부터 내 마음은 조급해진다.

엉뚱하게도 하루의 몰입의 순간을 여기서 마음껏 느껴본다.

조명은 어두워야 하고, 야식은 방송이 시작하기 전에 마무리한다.

혹시 마무리하지 못한 야식이 있다면 잠시 멈추고 방송 종료 이후 댓글을 보는 시간에 다시 젓가락을 든다.

연애 프로그램을 보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남편에게는 일찍 자도록 권유하고 금요일 늦은 밤을 나만의 시간으로 완전히 확보한다.

그렇다. 나는 드라마가 아닌 연애 예능을 본다.



TV는 안 보면서도 잊지 않고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바로 이 연애 버라이어티다.

10여 년 전 '짝'이라는 방송을 본 적도 없는데 나이 마흔에 20대 청춘남녀의 설렘과 질투로 두근거림을 느끼다니. 별일이다.

그런데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선배(?)들의 댓글을 보니 별일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원하는 커플이 되든 엇갈리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나는 그들을 통해 연애하는 기분을 대신 느껴본다.

생각해보니 내가 10여 년 전 '짝'을 안 봤던 이유는 연애를 하고 있었거나 할 수 있는 능동태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모든 상황들이 새로운 설렘과는 멀어졌다는 것이 내가 그 프로그램에 몰입하는 이유다.



일단 연애 프로그램은 연예인이 나오지 않아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아무나 살 수 없는 대저택에서 이성들과 함께 한 달을 산다는 대리만족, 그리고 춤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식상한 밀당의 감정이 아닌 춤의 고수들이 보여주는 그들과 춤의 찐 사랑을 뮤직비디오로 보여주니 시청자들이 만족할 수밖에 없다. (다만, 뮤직비디오 시작을 알리는 핑크빛 페이지와 배경음악에서 기대감이 살짝 반감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몸선과 처음 들어보는 노래들, 그리고 안무를 짜고 완성하는 단계까지 연애의 감정들이 함께 섞여 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이쯤 되니 광팬 같다.

아니 팬 맞다.

정작 나는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 방송이 끝나고 출연진들의 인스타그램을 얼마나 자주 들어갔는지 모른다.

아 나는 정말 한심하다.



남편이 내게 "저거 다 대본이야. 무슨 춤을 추면서 사랑을 키우냐"라고 했을 때, 나는 대본이 없다는 것을 100% 확신하며, 남편에게 맞대응했다.

"감정이 대본으로 되냐! 시즌 1에서 이어진 커플이 지금도 사귀면서 유튜브 하고 있다고!"

시즌 1의 커플 때도 나는 문지방 닳듯 그들의 인스타그램을 들어갔다.

오히려 애드리브를 찾기 힘든 철저히 대본으로만 이루어지는 드라마는 내게 재미가 없었다.

모두가 별그대의 도민준 앓이를 할 때도 나는 도민준이를 몰랐다.

연애 예능은 몇몇 보는 사람만 보기 때문에 대화의 폭이 적었지만 괜찮았다.

우리에겐 실시간 톡도 있었고, 많은 댓글들이 있었으니까.

댓글을 남겨본 적은 없지만 그 댓글을 읽고 마음이 동요되는 댓글에는 하트를 열심히 누른다.

온라인상에서 동지들을 만나니 참으로 신기하면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들이 어서 연애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요. 우리가 못하면 응원이라도 하죠.



내가 연애를 하고 싶은 상태도 아니고,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왜 연애 프로그램이 날 설레게 하는 걸까.

최근 읽었던 책,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를 덮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늙었다.

늙어서 그런 거였다.

읽고 있는 중간에는 주인공 찰리의 상황이 이해가 되고 재미있었는데 마지막쯔음 가서는 그 책에서 확 떨어져 나온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은 20대가 읽어야 완벽한 몰입을 통해 사랑의 설렘과 기대를 갖고 새로운 이성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껏 유치해도 좋았을 젊은 사랑, 밀당의 감정으로 밤새 편히 잠 못 이루던 그때, 가장 높은 하이힐과 가장 진했던 아이 메이크업을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을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진다. (여보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

새로운 대상이 아니라 사랑에서의 새로운 감정들이 더 이상은 샘솟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하며, 이쯤 되면 차라리 아무도 안 읽어도 좋으니 로맨틱 코미디 소설을 써봐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길거리 한가운데서 싸우는 커플을 보면 속으로 안 그래도 돼요. 그러지 마요하며 안타까워하고,

커플룩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커플을 보면 너무 사랑스럽고, 알콩달콩 애정행각을 하는 커플을 보면 귀여워 미치겠다.

그러니 내가 늙은 사람이 맞다.

그들의 연애감정에 나를 주입하고 내 젊은 시절의 연애를 떠올리며 잠깐의 타임머신을 타고 연애하는 기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내가 연애 예능에 미친거였군.



썸바디 마지막 방송을 한주 남기고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가 겨울왕국 2의 주제곡 중 하나였다.

엘사를 찾으러 간 안나를 향해 부르는 크리스토프의 노래였는데, 그 노래가 좋아서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조용필의 바운스 이후에 최근에 가장 많이 들은 노래였다.

원곡보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발음과 기교 없는 목소리에서 안나를 향한 크리스토프의 순수하고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 대신 느껴졌다.

크리스토프까지 나를 설레게 하다니. 미쳤다 정말.

그 노래를 들으면서 방송을 떠올렸다. 진짜 노래 가사처럼 사랑이라는 숲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상황들, 그들이 방송에서 보여준 행동이나 말들이 내 심장에 폭격을 가할 때 나는 더 응원한다.

'그래 제발 누구와도 좋으니 나중엔 꼭 커플이 되어달라고!'

이렇게 사소한 거에 설레고 좋아하니 남편이란 사람에게도 아직 설레나 보다.



썸바디는 끝났다.

매 회 방송이 끝나면 나는 출연자의 인스타그램을 새벽 동안 확인하고, 댓글을 보며 웃는 게 금요일의 밤의 일과였는데, 이제 정말 끝이 났다.

방송은 끝났지만 나의 관심은 아직 진행 중인 게 문제다.

썸바디 2 제작진들은 내게 따뜻한 날 다시 돌아오겠다는 자막만 남기고 꽃가루처럼 흩어졌다.

아 이제 내 금요일 저녁의 설렘은 뭐로 채우지 하던 찰나, 검색창에서 하트 시그널을 찾았다.

희망이 보인다. 2020년 1월에 방영 예정이라니.

나는 심폐 연애 소생술로 1월에 다시 태어난다. 그들이 나를 살렸다.




@byphap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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