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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phapha Nov 20. 2019

현실감각

건달 5년 차에 내가 얻은 것

                                                                                                                                                                                                                                                                                                                                   

지난 주말부터 갑자기 체감온도가 영하권으로 떨어졌다.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기엔 다소 무거운 감이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닭살이 돋긴 했지만 롱코트를 꺼내 입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를 등원시키러 가는 길목에서 내가 그리던 이상향의 엄마를 만난다.

검정 중형차에서 내린 하이힐의 그녀는 한 손은 아이의 유치원 가방을,  한 손은 바람에 흩날리던 얇은 치마를 잡고 아이에게 따라오라고 말하며 유치원 입구로 도도하게 걸어간다.

나도 그녀처럼 모직코트에 시폰 드레스를 믹스 매치하며, 펜디 가방을 들고 9cm짜리 하이힐을 신고 출근하던 여자였다.

사회생활을 몇 년 하던 시기에는 외제차에 대한 로망도 있어서 언젠가 내가 잘 나가는 팀장이 되면 그땐 꼭 오른손으로만 핸들을 잡고 주차는 한 번에 끝내며 왼손 팔꿈치는 창문에 기대 놓고 라운지 음악을 즐길 거라고 생각했다.

아 맞다. 선글라스는 사계절용으로 착용해야 하니까 차에 꼭 비치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

사회생활 몇 년 가지고는 외제차를 사서 할부로 납입하기에 버거우며, 난 아직 면허도 없다는 현실을.

업계에서도 최하권의 급여를 받았던 패션 대행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무슨 외제차람.

인하우스에서도 신용카드를 내 월급보다 더 많이 긁고 다녔던 무책임한 소비와 함께 겉만 화려해 보여도 까보면 알맹이 하나 없는 쭉정이 같은 사람처럼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발가락 끝에 힘주며 신었던 뾰족한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넉넉한 사이즈의 운동화로 집 근처를 이유 없이 배회하는 동네 건달 5년 차가 되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내 옆에서 남자아이 셋을 데리고 나온 엄마가 "추워 추워"하며 아이들의 점퍼 지퍼를 올리느라 정신없다.

남자아이 셋은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성화다.

엄마는 그런 아이들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휴대폰을 꺼낸다.

수능날 두 아이는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초등학생인 아이는 엄마를 따라 나온 것 같았다.

엄마는 버스 정류장 앞에 멈추더니 덩치가 큰 아이를 등에 없고 콧노래를 부르며 아이와 대화를 시도한다.

대충 틀어 올려 묶은 머리,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 급하게 나왔을 거라 짐작되는 꺾어 신은 여름용 신발에도 엄마는 참 행복해 보였다.

뭐랄까. 신랑 말고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쳤던 사람은 아직 없었는데, 그 엄마가 비슷했다.

무한한 행복의 감정이 내게도 전달이 되어 눈을 뗄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엄마는 업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 다시 아이의  손을 잡는다.

받아쓰기 시험을 언제 준비할까  물어보는 소리를 들으며 나와 반대방향으로 헤어졌다.

받아쓰기 연습해! 가 아니라 언제 준비할까?... 라니

확실히 그 엄마는 육아의 달인이다.




18kg이 넘는 딸아이를 지금도 나는 종종 업어주거나 안아준다.

아이가 그냥 예뻐서 지금이 너무 빨리 가버리는 게 아쉬워서 아이에게 물어보지 않고 "엄마가 업어줄게"라고 한다.

6살이나 되는 아이를 이유도 없이 업어주는 게 습관이 되면 안 된다고 남편에게는  훈수를 두면서도 이렇게 아이랑 둘이 있으면 이유 없이 업어주는 게 너무 당연한 이유가 된다.

언젠가 다시 직장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지금의 내 직업이 전업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주부로써의 일은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나를 놓지 않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직장생활을 그만두면서 하이힐 대신 편한 운동화만 건진 게 아니었다.

내가 머물러야 할 곳, 청소해야 하는 구역, 그날 저녁 메뉴 같은 현실감각을 얻었으니 허망한 꿈을 꾸었던 과거에 비해 나는 정말 사람이 되었다.

요즘은 건달 5년 차를 마무리하고, 한량이 되어보고 싶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과거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할 필요가 없다.

버스는 이미 출발했고, 나는 다른 노선을 타면 그만이다.





@byphap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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