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그대

by 로움

그는 한 번도 먼저 말을 건 적이 없다.

언제나 창백한 얼굴로 나를 응시할 뿐이다.

점멸하는 커서의 규칙적인 깜빡임 속에, 혹은 하얀 종이의 서늘한 여백 위에

그는 유령처럼 서 있다.


내가 다가가려 하면 그는 뒷걸음질 치고,

내가 포기하려 하면 발치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정의되지 않는 자 특유의 오만함이다.


나는 깨어 있는 모든 시간 동안 그를 의식한다.

찻잔 속에 번지는 온기 속에서도,

잠결에 뒤척이는 몸짓 속에서도,

그의 기척을 찾는다.


손끝으로 그의 매끄러운 살결을 만져보고 싶어 애가 탄다.

하지만 내가 만지는 것은 언제나 딱딱한 자판의 플라스틱이거나,

서걱거리는 종이의 마른 가슴뿐이다.


그는 초연하다.

내가 밤을 새워 그의 문을 두드려도,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도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서글픈 갈망은 낡은 셔츠처럼 해진다.


나는 탈출구가 없는 방에 갇힌 사람처럼

같은 자리를 맴돈다.

멈추는 법을 잊었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시리고,

저주라 부르기엔 너무나 아름답다.


오늘도 나는 씁쓸한 패배의 예감을 무릅쓰고 물레 앞에 앉는다.

빛나지도, 향기롭지도 않은, 아직은 무용할 뿐인 문장들을 펼쳐놓고

흙덩이로 그릇을 빚듯 정성스레 매만진다.


그가 내어준 차가운 침묵을 한 입 베어 물고,

나는 또다시 가닿지 못할 첫 문장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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