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은 왜 벌점이 되었는가

by 서담

《가정》이라는 글을 썼다.


내가 이룬 가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여성이 감당해온 역할과 그 안에서의 순응을 해부했다. 그리고 그 틈 새에서 어떻게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를 탐색했다.


구조를 설계하고, 감정을 촘촘히 엮었다.

나는 고통을 구조화했고, 문장은 그 결과였다.
글쓰기가 비로소 ‘글쓰기다워진’ 첫 순간이었다.


내 글을 누군가 읽고 있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쓰게 만드는 동력이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고, 그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
방장을 비롯한 몇몇 멤버가 댓글을 남겼다.


“어휘력이 뛰어나요.”
“서온님은 좋은 가정을 이루셨어요. 엄지척!”


이제는 그런 말들에 쉽게 들뜨지 않았다.
그들이 읽고 있는 것은 ‘글’이 아니라, ‘글쓴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댓글은 늘 비슷한 톤을 유지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그랬어요.”
“좋은 글이에요.”


그 말들은 문학적 감상이 아니라, 일종의 승인처럼 들렸다.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에요’라는 통과의례.


그곳은 작품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읽고 승인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문학적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장은 어디서 흐르다 멈췄는지, 감정은 얼마나 진폭을 가졌는지, 문장과 문장은 어떤 리듬으로 이어졌는지

—그런 이야기.


윤시화라면, 다를 거라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댓글이 달렸다.


“삶을 정말 찬찬히 들여다보셨어요.”

우아한 서문 같았다.


그러나 이어진 문장 앞에서 나는 멈칫했다.
“저라면 남편한테 백만 대 맞았을 것 같아요.”
“그건 버르장머리 없을 때 듣는 말이죠.”


그 문장들은 칭찬이 아니라 판단이었고, 감상이라기보다 징벌에 가까웠다.
그녀는 글 속의 감정을 읽고, 곧장 나를 평가하고 있었다.


글과 나를 구분하지 못한 채, 감정에 벌점을 매기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감정을 회상하고, 언어로 정제해 다시 살아보는 일.

그렇게 만들어낸 문장이, 왜 언제나 ‘인물’로 되돌아오는가.


내가 쓴 것은 나의 고통이자 동시에 하나의 구조였다.
그 감정의 기원을 재구성하고, 언어로 봉합하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글의 구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나의 태도, 나의 감정, 나의 인격만을 말했다.


나는 어느새 알고 있었다.
이곳은 글쓰기 모임이지만, 글은 살아남지 못한다.


문학은 없고, 감정 정치만 남는다.
글은 평가받지 않고, 글쓴이만 평가받는다.


윤시화의 칼날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나는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


그 칼조차 서사의 일부로 꿰매 넣을 수 있다면,
나는 이곳에서도 끝까지, 문학으로 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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