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서 배운 온도

강도와 온도

by 서담

한가온이라고 했다.

수업을 신청하며 그녀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내 수업 방식이 궁금하다며 전화 상담이 가능한지 물었다.


나는 곧 연락드리겠다고 답장을 보냈지만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의 미세한 말투. 그 말투에 스며 있는 감정을 받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럼에도 화면을 열어 그녀의 프로필을 눌렀다.
낯선 사람과 오래 이야기를 하기 전, 그 사람의 결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프로필 속 그녀는 앞머리를 가볍게 내리고 짧은 포니테일을 묶은 채 옆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뒤편의 책장과 서랍장이 단정하게 서 있었지만 그 단단함조차 그녀의 싱그러움을 가리지 못했다.


전화를 걸자 긴장과 따뜻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선생님이시죠? 안녕하세요.”

나는 준비해둔 수업 이야기를 숨 가쁘게 늘어놓았다.
그녀는 내 말을 끊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심스럽게,

“수업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라고 물었다.

그 한 문장은 ‘나는 당신의 진심을 믿어볼게요’라고 말하는 작은 응답처럼 들렸다.


우리는 DMC의 북적이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멀리서도 그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분홍빛 볼, 싱그러운 미소,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
그녀 앞에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내가 말을 하면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리듬에 맞춰 내 말에도 속도가 붙었다.
수업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 삶의 서사가 툭 하고 흘러나왔다.
그녀는 판단 없이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녀에게는 늘 온도가 있었다.


우리는 오래 만났다.
매주 한 번, 두 시간. 테이블 위에는 교재와 노트, 커피잔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
그녀는 말을 놓는 것이 오히려 불편한 사람이라고 했다.
극존칭을 유지한 채, 그러나 말의 온도는 언제나 상대를 향해 있었다.


내가 중국 만두 이야기를 하면 맛집을 찾아 보여주었고,
친구 이야기를 꺼내면 자기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며 나중에 함께 만나자고 했다.
나는 그 열린 틈으로 나의 서사와 심연을 쏟아냈다.


어느 저녁, 나는 그녀에게 내 가족사와 폭풍 같은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두 손으로 컵을 감싸쥐고
자신의 아픔과 그것을 견뎌온 방식을 천천히 건네주었다.
그녀는 온도로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우리의 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내 삶이 크게 흔들렸고, 나는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수업은 끝났고 우리는 서로의 일상 속으로 흩어졌다.


여섯 해가 흘렀다.

어느 날 문득 가온이 떠올랐다.
카카오톡 어딘가에 남아 있던 그녀의 이름을 찾아냈다.
오래 미룬 말을 꺼내듯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합평할 겸… 밥 먹을래요?”


뜬금없는 제안이었지만 그녀는 조용하게 장소를 정했다.

일식집 유리문 너머로 메뉴판을 보고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여전히 한가온이었다. 조용하고, 싱그럽고, 따뜻한 기운이 스며 있는 사람.


나를 보자 능숙한 인사를 건넸다.
예전의 수줍음 대신 먼저 수저를 정돈하고 차분히 챙겨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자연스러움이 조금 낯설었다.


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말했다.

“선생님이 먼저 말을 걸어주시는 게… 항상 좋았어요. 저는 원래 먼저 다가가지 못하거든요.”

그 말에 나는 멋적게 웃었다.


밥을 먹는 동안 그녀는 능숙하게 내 마음을 들어 올렸다.
내가 쌓아두었던 고민 하나까지 조용히 건져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말을 잘했다면… 아마 글을 쓰지 않았을 거예요.”


그 말에서 오래전 그녀의 결이 다시 보였다.
조심스럽고, 따뜻하고, 타인을 다치지 않게 아주 천천히 건드리는 사람.

그럼에도 나는 또 내 강도로 말하고 말았다.


“전요… 사람을 아무나 만나지 않아요. 제 기준은 딱 세 가지예요. 진심, 진실, 그리고 사랑.”

그녀의 볼이 붉어지고 눈이 깜박였다.


그 말은 그녀를 향한 선언이 아니었다.
내가 겪어온 관계의 피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말이었다.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 강도가 조금 높았다는 사실을 늦게 깨달았다.


가온은 예전처럼 천천히 온도로 대답했다.

“저는요… 사랑 받는 법을 잘 모르겠어요.”

그 부드러운 고백 속에서
우리의 말이 다른 높낮이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상사 이야기를 꺼냈다.
상사는 에너지와 파장이 큰 사람이라고 했다.
희노애락을 생산성으로 전환하는 대신,
일상의 스트레스를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런 상사가 멋지면서도 안쓰럽다고 했다.
할 수 있다면 그에게도 자신의 따뜻한 한 조각을 내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끝에 걸린 작은 떨림이 들렸다.


가온은 늘 그랬다.
타인의 강도를 비껴가는 대신, 자신만의 온도로 세상을 조절하는 사람.
자신만의 방법으로 누군가를 지켜주는 사람.


그 말들에는 내 강도 속에서도 진짜로 닿아보려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한가온이라는 이름의 뜻을.
따뜻한 온도로, 상대를 한가득 품어주는 사람.


그녀 곁에서
내 결핍과 무례함이 여전히 나라는 사람의 일부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일식집 문을 나서자 그녀는 지하철역까지 오래 배웅했다.


오랫동안 우리는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질 것이다.

다음번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나는 강도가 아닌,
그녀에게서 배운 온도로
말을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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