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을 앞두고, 나에게도 소소한 추억 하나를 남기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지금의 나를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페이스북에서 이설아 작가님의 글을 읽기만 하던 내가, 그날은 조심스럽게 ‘참여’ 버튼을 눌렀다. 참여 링크에는 글쓰기 오두막에 오고 싶은 이유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가장 솔직한 말을 꺼냈다.
“저에게 글쓰기는 ‘공기’입니다.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때로는 절박하게 삶 속에서 이어져 온 것이 글쓰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쓰기를 단순한 취미나 기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호흡이라고 여깁니다.”
지난 8월 18일, 알림톡이 울렸다. “2025 글쓰는 오두막 글지기에 선정되셨습니다” 10대 1의 경쟁을 뚫고 내 이름이 올라갔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그러면서. 무엇보다 복직 일정과 겹쳐 망설이던 나에게 이설아 작가님은 말했다. “일정 조율하면 돼요. 정아님은 꼭 오셔야죠”라고. 톡으로 주고받은 짧은 메시지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건 우연이 아니다. 대체 내가 뭐라고, 1박 2일 일정을 맞추기 위해 12월에 예약을 앞당겨 11월로 옮겨가며 시간을 맞춰주셨을까. 다시 생각해도 놀랍고도 감사한 일이다. “이설아 작가님은 복 받으실 수밖에 없어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11월 11일, 새로운 일상을 앞두고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던 시간이었다. 복직을 이틀 앞두고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니, 막둥이 저녁밥까지 챙겨놓고서야 평택IC에 올라섰다. 설렘을 안고 오후 1시에 도착한다고 문자를 드렸더니, 곧바로 연락이 왔다. “선생님,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에요. 날짜를 잘못 체크하신 것 같아요(웃음).” 이렇게 덤벙대서야 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다음 날인 12일에 다시, 경북 영주로 향했다.
“엄마, 졸음운전하면 안 돼. 졸리면 꼭 말해줘” 막둥이의 눈은 동공이 확장된 채 거의 깜빡이지 않았다. 무서웠던 모양이다.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러 스트레칭을 하고, 숨을 고른 뒤 다시 (경북 영주 방향) 고속도로에 올랐다. 긴 터널을 다섯 개 넘게 지났지만, 길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당진에서 영주까지 정확히 세 시간. 눈은 따갑고 허리는 아팠지만 “온리앳 오운리 오두막 펜션까지 무사히 가자”는 마음 하나로 운전대를 붙잡았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가장 가까운 부석사에 먼저 들렀다. 태어나 처음 가본 곳이었다. 노랗고 빨간 단풍을 보고 가을은 제대로 만끽했다. 부석사 초입부터 막둥이는 나를 찍고, 나는 막둥이를 찍어주는 여유로움까지 챙겼다. 혼자였다면 가을 느낌을 담아내지 못했을 장면들이다. 바스락 바스락 가을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느낌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나이들면 단풍이 좋고,바다가 좋고, 산이 좋다는데.....인생의 반쯤을 건너온 지금, 나도 모르게 초고령화 시대로 한 발 먼저 들어선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2년 6개월 전, 항암치료를 받고 '포켓몬 빵이 뭐라고' 에세이 한 편을 써 냈다. 합격했다. 이후 당진시립중앙도서관에서 <1인 1책 프로젝트 에세이 글쓰기>로 처음 만난 이들과 함께하면서 만감이 교체했던 시간들. 일련의 모든 불안과 기대가 한순간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하지만 여유에 취해 있었던 걸까. 시계를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 세 시까지 도착해야 했는데” 차로 다시 50분.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온리앳오운리>에 도착했다. 구불구불한 언덕길 끝, 짙은 네이비 빛의 작은 오두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막상 오두막 펜션을 보니 상상 그 이상이었다.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주차하고 긴장했던 근육이 스르르 풀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이 오는 날엔 가파른 언덕 위를 어떻게 올라가지? 염화칼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그러면서 또 감탄했다. 영주의 맑고 조용한 공기가 잔향을 단숨에 지워버렸다. 꿈 같은 집이었다. 몇 가지 짐을 내리고 숙소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도착 3시간 전부터 초입 사진을 찍어 보내주시며 안내해준 문자 한 통. “정아쌤, 표지판 따라 언덕 끝까지 올라오시면 왼쪽에 주차장이 있고요. 오른쪽 위로 보이는 숲 뷰 오두막으로 짐을 내려놓으시면 돼요.급하게 오지 말고,천천히요.”라고.
그 짧은 안내 속에도, 낯선 이의 발걸음까지 살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세심한 배려가 스며들어 있었달까. 들숨과 날숨이 자연과 겹겹이 스며들었다. 오두막에 있었던 순간만큼은 아무 노력도,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이른 겨울의 냄새, 눌린 낙엽 위로 번지는 흙내음, 멀리서 은근히 풍겨오는 장작 타는 향이 포개져 공기를 채웠다. 그리고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오드아이 고양이와 알록달록한 두 마리 냥이까지. 반가움은 더 깊어졌다.
“엄마, 여긴 당진보다 공기가 진짜 달라. 너무 상쾌해.” 막둥이는 내 품에 폭 안겨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그 순간, 같이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혼자만의 시간을 꿈꿨다. 수능 일정 덕분에 막둥이와 함께 오게 되었고, “아이와 같이 오셔도 괜찮아요”라고 망설임 없이 품어주신 작가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이번 여행은 시작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출발 전부터 마음이 한껏 들떠 있었다.
그날 저녁, 작가님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미션이 주어졌다. 경북 영주에 도착한 이후, 내가 가장 전하고 싶은 마음을 짧은 글로 써 보내는 것이다. 막둥이는 <숲 뷰 오두막> 침대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나는 노트북을 펼쳤다. 밤은 깊어갔고, 숲은 놀랄 만큼 조용했다. 어두운 창 밖에는 달빛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엄마,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자”고. 그러고는 아이폰을 내려놓지 못한 채 숏츠로 고요를 깨뜨렸지만, 그래도 이 밤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했다.
분명한 건, 삶은 거창한 결심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모여, 오늘이 가장 행복하다고 마음껏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온리앳 오운리의 은은한 불빛처럼, 누군가 건네준 따뜻한 문장 하나처럼, 내 삶도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작가님의 피드백이 이어졌다. “정아님 글에는 이미 힘이 있어요. 이제 정아님 자신에게 써 보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깊은 곳이 정확하게 울렸다. 나는 늘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글을 써왔다. 아픈 사람, 지친 사람, 버티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문장 하나를 건네며 살아왔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에게는 단 한 줄의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아… 내가 나를 너무 관과하며 살았구나” 싶었다.
<온리앳 오운리> 오두막에서의 1박 2일은 생각보다 깊고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막둥이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 애교를 부리던 오드아이 ‘꾸기’냥이는 사랑스러운 존재감을 드러냈고, 작가님이 직접 농사를 지어 따왔다는 부사과의 아삭한 단맛, 오래 씹을수록 마음까지 달게 만들었다. 아침에 내어주신 에그샌드위치와 신선한 오렌지 착즙 주스는 건강한 맛이었다.
프라이빗 한 오두막에서의 한 끼가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은 몰랐으니까. 무엇보다 이곳은 작가로서의 자긍심을 다시 심어준 자리였다. 고요한 산자락의 바람 속에서 글을 쓰는 이유와 앞으로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정돈되었다. 숲 속 오두막은 그런 곳이었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쉬게 하고, 출판의 꿈을 꿀 수 있게 하고, 다시 일상의 들숨과 날숨으로 단단해지게 하는 곳이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또 올 수 있을까.
‘글쓰기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라는 글지기 신청 문항에 ‘호흡’이라고 답한 이는 그가 유일했다. N년차 시민기자이자 에세이집 저자, 그리고 완치 판정이 3년이나 남아있는 암환우라고 자신을 소개한 정아쌤은 오운리 단풍이 곱게 지기 시작하던 11월 중순, 일곱 번째 글지기로 <글쓰는 오두막>에 방문했다.
수많은 지원자 중 글지기를 선정하는 나의 기준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평소 글을 쓰는 사람일 것. 다른 하나는 마주앉아 대화하고 싶을 만큼 궁금한 사람일 것. 김정아 쌤은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사람이었다. 호홉처럼 써 내려간 그의 글이 궁금했고, 여전히 분투중일 그의 삶도 궁금했다. 그는 글지기로 방문하는 날이 마침 수능일이라 막내딸을 집에 혼자 둘 수 없었다며 그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머금은 고등학생 딸과 함께 도착했다. 갑자기 노란 스마일 풍선이 오운리 정원에 두둥실 떠오른 것 같은 오후였다.
마치 막내동생 집에 방문한 큰 언니처럼 이것 저것 선물을 많이도 싸온 그는 자신이 높은 경쟁률을 뚫고 <글쓰는 오두막> 글지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하다고 했다. 그간 여러 작가님을 통해 에세이 쓰기도 해보고, 단편소설도 써보며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아왔다는 그는, 작년 겨울 <살기 위해서 다시 글을 씁니다>라는 에세이집을 자비 출판했다며 수줍게 건넸다. 책을 내고 보니 부족한 곳이 보여 다시 제대로 된 출판사를 만나 정식 출간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글과 직접 찍은 사진이 어우러진 책을 넘겨보는데 ‘그는 정말 쓰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ISBN도 찍지 않은 초판을 거의 다 팔았다는 설명을 건네 듣는데 그의 열정이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의 무엇이 그토록 글을 쓰게 했을까. 어떤 힘이 그를 이토록 씩씩한 작가로 만들었을까 생각하는데, 아이들에게 엄마가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남겨주고 싶어 열심히 글을 썼다는 말을 그가 덧붙였다.
눈앞의 삶이 불투명하게 기울어지는 순간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투병을 하면서도 세 아이의 엄마로, 직장인으로, 시민기자로, 매일의 일상을 지탱해야 했던 그의 시간은 어떤 두께였을까. 그 까마득한 깊이를 잠시 가늠해보려다 그가 호흡하듯 기록해온 결과물을 다시 보자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홀로, 외롭게, 그러나 쉬지 않고 써온 그의 시간들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반짝반짝 드러내고 있었다. 숲속 오두막에서 ‘글쓰는 이’의 정체성을 다시 새긴 그가 이튿날 짐을 챙기며 내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글쓰는 오두막>과 나에 대한 글을 써서 늘 기고하는 매체에 글을 싣고 싶다고 했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글쓰는 이를 향한 사랑과 존경이 두 눈에 묻어나던 그는, 커다란 카메라로 가을 낙엽을 쓰는 나를, 내 곁을 호위무사처럼 지키는 꾸기를, 짙은 가을이 내려앉은 오운리정원 곳곳을 담아냈다.
사진 찍는 그를 보자니 이제껏 그를 일으켜 세운 단단한 코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 앞에 펼쳐진 생의 기회를 한 톨도 놓치지 않으려는 저 열심, 사진이든 글이든 가리지 않고 눈앞의 삶을 정성스레 담아내는 태도가 그를 이토록 생기있는 삶으로 이끌었구나 싶었다. 마지막 오분까지 알뜰히 촬영을 끝낸 그가 막내딸과 함께 환한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다음에 만날 땐 그의 손에 새로운 책이 들려있을 것만 같다. 조금 더 긴 삶의 호흡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설아 작가님 글 중에서…
#충남당진에서 영주까지
#온리앳오운리
#글쓰는오두막
#일곱번째글지기
#꾸끼는_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