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나를 여행하는 기술, 니체와 함께 산책을
약간의 며칠을 빼고는 정말이다.
10년을 매일 같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폭염 속에서도 한파가 닥쳐도 산책을 했다.
나는 특별한 재능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쇼핑할 때-.-;;)
하지만 '삶은 나를 찾아 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 몇 개의 재능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산책'이다.
"산책을 재능이라고 할 수 있나요?" 라고 의문이 들 수 있다.
산책 자체가 재능이라기보다 산책하면서 신비한 체험을 가끔 하는데 그것을 종종 느낀다는 것이 나의 재능인 듯 싶다.
10년 동안 매일 산책을 한데는 키우는 강아지를 위해서였다.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된(추측) 강아지를 키우게 되면서 강아지가 어느 정도 사리분별(?) 할 줄 아는 시기부터 산책을 시작했다. 데려온 지 2달쯤 뒤였을 것이다. (강아지 분유를 한 달 넘게 먹였으니, 지금 기억으로는 그렇다.)
강아지가 없을 때도 가끔 탄천을 산책하는 일을 좋아했다. 특히 폭염이 없는 여름밤. 여름밤 냄새를 무척 좋아하니까.
하지만 강아지가 생긴 후 매일 산책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첫 산책을 나갈 때가 생생히 기억난다.
겨울 한가운데, 아주 작아서 패딩 안에 쏙 집어넣고 처음으로 (병원 갈 때 빼고)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패딩 안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을 꿈뻑거리며 세상을 이리저리, 어리둥절 바라보던 꼬물이가 너무 보고 싶네. 이제는 아저씨 느낌 ㅎㅎ
탄천에 평상 같은 벤치가 있었다.
아직 새끼라는 느낌에 땅에 바로 내려놓지는 못하고 평상에 내려 놓아 볼까 했다.
근데 패딩 속에서 꺼내자마자 발버둥을 쳤었다.
당연히 강아지들은 산책을 좋아하니까 좋아할 줄 알았다. 새끼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평상에 발이 닿기도 전에 패딩 속으로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써서 다시 쏙 넣었더니 그제서야 안심했다.
겁이 아주 많은 강아지였다는 걸 그때는 잘 몰랐다.
아무튼 내 품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나의 강아지의 첫 산책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너와의 첫 산책이었고.
그렇게 겁이 많던 강아지가 언젠가부터 나가려고만 하면 난리가 났다.
산책이라는 단어를 알아듣기 시작했고, 산책 가자고 하면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그러니 아무리 귀찮아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야외 배변을 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집에서 안 한다는 얘기다.
사회성을 기른다고 매일 산책을 했더니 어느 순간 집에서 볼일을 보지 않았다. 그러니 꼭 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매일의 산책이 시작되었다.
20대의 나는 탄천을 빠른 걸음으로 산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다행히 집이 탄천과 가까웠다)
그때는 이유가 딱 두 가지였다. 뱃살이 좀 나온 것 같을 때, 이별의 아픔이 있을 때.
두 가지 모두 산책은 큰 효과가 있었다. 하루 몇 시간씩 걷고 나면 뱃살은 빠졌고, 마음은 가벼워졌다.
아주 큰 효과를 본 때는 20대가 저물 무렵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을 때였다.
집 뒷산을 매일 강아지(그때는 다른 강아지, 이름은 몽실이)와 산책하면서 극복해낸 때이다. 병원도 많이 다녔고, 약도 먹었지만, 결국 나를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게 한 건 강아지와의 산책 덕분이라고 확신한다. 산책 전과 후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 기억으로 나는 비슷한 감정이 들 때 가끔 산에 올랐고, 탄천을 산책했다.
하지만 매일 산책을 해야 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자발적이라기 보다 규칙척으로 매일 해야 하니까.
꿀 떨어지는 얼굴로 세상 행복하다는 그 똥꼬발랄 때문에 귀찮다는 생각은 잠시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존재를 위해서 나의 귀찮음 따위는 금새 사라졌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우비를 입히고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을 누볐다. 우비를 입고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나는 강아지의 뒤태를 보며 폭우가 쏟아지는 것도 잠시 잊었다.
폭설이 내리는 날은 무조건 나갔다. 눈 위에서 뛰어 노는 걸 찍어야 했다. 그날은 아무도 산책하는 사람이 없다. 꼭 둘만의 세상처럼 눈 위를 뛰어 다니곤 했다.
평소에는 산책 코스를 달리하며 걷는다. 냄새를 충분히 맡으라고 나는 강아지에게 걸음을 맞춘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거나 시간이 정해져 있을 때는 강아지가 내 속도에 맞춘다. 나는 이런 똑똑한 강아지를 만난 게 늘 복이라고 생각한다.
이사를 갈 때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산책할 곳이 있느냐는 거다. 그래서 직장과 다소 거리가 멀어도 산책할 곳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렇게 매일 아침 산책을 했고, 때로는 오후에도, 저녁에도 산책을 했다.
산책 시간은 강아지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달라졌는데, 최근엔 늦은 브런치 시간에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산책을 거르는 날은 없다.
내가 출장을 가거나 부재 상태일 때도 강아지는 누군가의 손에서 매일 산책을 했고, 나는 아퍼서 병상에 누워 있지 않는 한 매일 산책을 한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더이상 산책나가는 것이 귀찮지 않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는 걸. 그냥 몸에 밴 습관이 되었다.
습관이 됐다는 건 산책을 안하면 이제 이상하다는 것이다.
하루 중 그 시간이 주는 행복이 너무 컸다.
그 이유는 강아지와 함께여서도 있지만, 산책 중에 느끼는 환기와 비움, 때로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그날은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던 깊은 밤이었다.
가족들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여느 때처럼 강아지와 함께 연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도 물론 산책을 했다. 산책이 습관화되면서 뇌가 환기되고, 몸이 개운해지는 것이 늘 좋았는데 그것이 다였더랬다.
하지만 그날 뉴스에서 종각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보다가 바람이 쐬고 싶어져 강아지를 데리고 공원엘 갔다.
큰 호수 둘레로 산책길이 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산책길로 들어서려면 주차장에서 몇 십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강아지는 자다 말고 계 탄 애처럼 신나서 따라나서더니 계단에 도착하자 성큼성큼 나를 이끌었다. 계단 끝에 오르면 호수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그날은 물안개가 자욱이 껴 신비로운 광경을 연출했다. 마치 다른 차원의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도, 동물도. 오직 강아지와 나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물 안갯속을 거닐었다.
차가운 공기와 섞인 물안개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 깊숙이 들어와 퍼지는 듯했는데, 그 느낌이 매우 상쾌했다. 그러고 보니 12월 31일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에 이 공원에 온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둘이서 새해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모두 가족과 연인과 함께 있을 시간. 그래서 아무도 없는 공원이 너무 좋았다.
20분쯤을 걷다가 호수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강아지도 옆에 앉아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부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호수 한곳을 함께 바라보는데 모든 것이 멈췄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피어오르던 물안개의 방울방울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귀에 에어팟을 끼면 주변 소음이 차단되는 것처럼 소리마저 멈췄다. 소리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고요함이 갑자기 찾아왔다.
그리고 물안개 방울 사이로 강아지와 함께 걸었다. 방울이 바로 옆에서 크게 보였고, 강아지와 나를 잇는 목줄이 강아지와 나를 하나처럼 이어주었다. 이 모든 광경과 느낌을 강아지도 똑같이 나와 느끼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몇 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세상이 멈추고, 물안개 방울 사이를 고요 속에서 함께 걷는 기분은 신비롭고 행복이 충만한 체험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가끔 강아지와 산책할 때 벤치에 가만히 앉아 그때의 경험을 하곤 한다.
나비가 크게 보일 때도 있고, 벌이 크게 보일 때도 있었다. 풀숲의 이슬 사이로 걷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원할 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행해질 때만 그렇게 되었다.
나는 환상이나 망상, 환각 증세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명분은 엄마가 가끔 보는 귀신들의 얘기를 믿기도 했고, 나는 예지몽을 잘 꾸는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 얘기는 밤을 새워도 모자를 정도로 에피소드가 많다.)
하지만 깊은 명상에서 체험한 얘기들을 접하고, 망상이 아닌 깊은 명상 상태였음을 알게 되었다.
산책은 나에게 가끔 깊은 명상이라는 선물을 준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을 얘기해 보려 산책에 관한 책을 찾다가 많은 철학자들이 산책을 하며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철학자들이 산책론자였다는 건 아주 유명한 얘기다. 그중 니체에 관한 얘기가 나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다.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스위스 바젤대학교 고전문헌학과 교수가 됐지만, 몸이 아파 35세에 교수직을 그만 두고 휴양지에 머물며 글을 쓰거나 사색을 했다고 한다.
주로 낮에는 식당이나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고, 가끔 호텔 로비에 있는 피아노를 쳤다.
세상 일은 신문과 잡지에서 얻었고,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몸이 얼마나 아프면 교수직까지 그만 두고 이런 생활을 했을까 싶은데, 눈의 통증, 두통, 위통, 구토 등 극심한 통증이 찾아 올때면 아편으로 견뎠다고 전해진다. 그의 질병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후대 의사들은 뇌종양 혹은 핵상 마비 질환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단다.
(*핵상 마비 질환: 진행성 핵상마비는 뇌피질 및 피질하 조직의 신경섬유 변성을 초래하는 파킨슨 증후근으로 신경퇴행성 질환 중 하나. 운동장애, 안구 이상, 성격의 변화, 치매, 인지장애 등의 증상이 있다.)
그에게 산책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구원이었다고 한다. 가볍게 동네를 거니는 산책이 아니라 8시간에서 10시간씩 산책을 즐기곤 했단다.
책에서 37세의 니체가 산책하던 광경을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스위스 동부를 100km 가량 가로지는 계곡 지대인 엥가딘에 머물 때, 인(INN) 강이 흐르는 약 15km 사이 4개의 호수(실스 호수, 실바플라나 호수, 샴페레 호수, 생모리츠 호수)가 있었는데 해발 약 1800m 지대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들이라고 한다. 이 호반을 따라 숲속 길을 매일 혼자 걸었다고 한다.
니체를 구원해 준 이 산책의 시간은 도시와 사람들, 번잡한 세상에서 최대한 물리적으로 멀리 벗어나는 현실적인 구원이었다. 자연에 파묻혀 스스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드는 일이었다.
우리는 자연에 관해 자주 이야기한다.
그때마다 자연스레 자신을 잊게 된다. 인간도 자연이다.
진짜 자연은 우리가 자연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물아일체.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경험은 불교와 명상에서 흔히 말하는 개념이다. 니체가 표현한 경험도 물아일체가 아닐까.
니체는 자연에서 찾아낸 3가지를 사랑했다고 한다. 광대함, 고요함, 햇빛.
그리고 자연 속에 있다 보면 15분간의 깊은 침잠이 몇 번이나 찾아온다고 했다.
그 여덟 시간 동안 몇 번인가 아주 깊은 15분이 찾아온다.
그때야말로 내 안의 가장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활성 음료를 마실 수 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깊은 공감을 했다. 내가 놀란 부분이기도 하다.
갑자기 철학적이 되어 나 또한 당황스럽지만, 삶이 일상에서 얻는 작은 깨달음을 알아 가는 것이라면 내가 경험한 것을 그 시대 사람들이라고 경험 안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니체는 자기 안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활성 음료를 마셨다고 표현했다.
이 상태가 '깊은 명상 상태'였음을 저자(시라토리 하루히코, 일본 최고의 니체 전문가이자 철학자)도 얘기하고 있다.
나 또한 아주 잠깐이었지만 산책 중 느낀 신비한 경험과 닮아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니체는 산책하는 기쁨을 종종 친구에게 편지로 얘기했다.
나는 산책하다가 울고 말았다네.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에 기쁨이 차올라 나는 노래 불렀고,
또한 무의미한 말을 무심코 입 밖으로 꺼냈다네.
나는 나 자신을 훨씬 뛰어 넘었지.
실제로 산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건강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혈액 순환 개선, 당뇨병 위험 감소, 스트레스 해소, 수면 개선, 뇌 활성화, 면역력 강화 등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산책을 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는 니체에게 '몸과 마음의 구원'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한 듯 싶다.
일반적으로 명상은 가부좌로 앉아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떠올린다. 나 또한 명상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명상의 이미지는 그렇다.
그러나 산책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명상 상태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도 일어난다. <내면소통>(김주환)에서도 이러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얘기를 하자면 또 길어지니깐...)
글이 좀 길었지만,
니체의 신비로운 경험이 일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산책이 그 중 하나라는 것.
자연과 하나 되는 경험은 한번쯤 해보면 행복하다는 것.
https://youtu.be/KZmJs9jWfS4?si=It02M13hPmEtooTI
@bysummer
강아지도 자연의 일부니까.
너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삶은 철학 속을 걷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