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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은성 Nov 03. 2020

홍시와 귤

생백수의 소확행

백수 4개월 차.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기 싫을 때 안 가는.


어쩌면 내 인생 통틀어 몇 안 되는 특별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계획이 있는 백수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나름의 계획도 생기고 하고 싶은 것들도 생겼다.

그냥 조금 쉬다가 수익활동을 이어하겠지 라는 생각이었지만 아르바이트 조차 안 하는 생 백수다.


생 백수가 제일 좋은 것은 나와의 시간을 마음껏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가벼이 먹다 보니 도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게 된다.


미루고 미뤘던 글쓰기 수업을 받고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어 작가가 됐다.

사실 작가라고 하면 하나의 직업으로 등단을 해야 한다거나 책을 출판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 같은 생 백수에게 작가라니. 노트북을 가지고 커피 향이 솔솔 나는 경치 좋은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노라니 아, 감격스럽다. 꼭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 만 같다.

꼭 써보고 싶던 에세이도 써보고 (물론 급히 써서 수정 투성이지만) 출판 프로젝트에 지원도 했다.


나에게 있어서 글이란 감정 기록부터 시작됐다. 수기로 적었던 다이어리부터 시작해서 싸이월드에 생각나는 감정을 글로 적기도 했었다. 하지만 싸이월드가 사라지고 곧장 트위터로 갔다. 트위터는 짧은 글들을 쓰기에 안성맞춤이라 길을 가다가 문득 느낀 감정들, 음악 듣다 생각 난 감정들, 전시회를 보다가 느낀 생각들 여러 가지를 적기 시작했다. 누군가 봐 달라는 것보다 내 순간의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봤을 때, 그 날짜에 해당하는 감정들이 떠올라 타임머신을 타고 그곳에 가있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글을 끊지 못한다

결국엔 글 쓰는 법을 배우게 됐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첫 라이크가 눌렸을 때, 첫 구독자가 (얼마 전에 생겼습니다 ㅜㅜ 너무 감격스러워요.... 감사해요..) 생겼을 때. 핸드폰에 알람이 울렸을 때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 화면을 캡처해두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신기해하며 본다. 


내 글은 나만보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봐준다는 게 이렇게 기쁘다니.




요새 나의 하루는 보통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 공복 스트레칭과 간단한 홈트를 하고 아침을 먹고 책을 읽고 쉬다가 점심을 먹고 헬스장으로 간다. 운동을 한 후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남은 시간에 글을 쓴다. 


백수생활을 하며 도전하는 것 중 또 하나는 바디 프로필이다.

언젠가 해봐야지 라는 생각만 가지고 미뤄뒀던 바디 프로필은 백수생활을 시작하며 했던 이별이 큰 이유라 볼 수 있다.(긍정적인 자극 점 찾기)  물론 이별 때문만은 아니다. 낮아진 내 자존감을 찾기 위해 선택한 제일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2달 정도가 지난 지금 나는 총 8kg을 감량했다. (바디 프로필과 다이어트에 관련된 글은 나중에 써보겠다)

11월 14일이 원래 D-day였지만 코로나 때문에 헬스장 문 닫은 거, 추석 때문에 내 의지와는 다르게 몸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미룬 날짜가 12월 6일. 오늘로부터 정확히 D-33.


3개월 정도 식단과 운동을 병행하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이 생활을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PT를 받고 있는데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낙이 없다고 말했더니 자기도 그렇단다.


으.. 대단한 새램덜..


감정조절도 되질 않고 몸에 힘이 없다. 가끔은 언어능력도 떨어지는 거 같다. 후

그렇지만 좋은 점도 많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가볍고 체력도 좋아져서 웬만해선 숨이 안찬다. 

그리고 무엇보다 옷 태가 나기 시작했고 얼굴도 발도 작아졌다. 웃음도 많아지고 뭘 하든지 간에 자신감이 생긴다.  바디 프로필까지는 아직 조금 더 빼야겠지만 거울 보는 게 즐거워졌다.


왜 진작 하지 않았을까 하다가도 힘이 들고 운동하기 싫은 날엔 두통이 진짜 심해지긴 하지만.


쨋든 이런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간식이 과일이다.

사실 그전부터 과자나 빵 같은 군것질은 잘 먹지 않는 편이긴 했는데 막상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나니 저런 것들이 더 먹고 싶다. 욕구가 아주 폭발한다. 특히 아이스크림.


그 욕구를 과일이 채워준다. 남들은 과일도 살찐다고 하지만 나에게 허락된 과일은 포기하지 못하겠다.


아침에 종종 공복에 산책을 하곤 하는데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과일, 야채가게가 정말 많았다.

지나다니며 구경하고 가격 비교하기를 며칠 째, 어느샌가 내 주머니엔 현금을 쥐고 우리 엄마 또래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들 틈에서 바구니를 들고 과일을 주섬주섬 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어느 날은 아보카도를 코스트코보다 싸게 샀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오자마자 신문지로 하나씩 싸서 냉장고에 넣는데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더라.


요새 나의 최애는 홍시와 귤이다.


6개 1팩 3000원/ 2팩 5000원.

10kg 노지감귤 소중과 15000원.

5kg 중과 노지감귤 인터넷에서 2만 원 이던가? (맛있다고 리뷰가 많길래 사보았다)

정말 정말 정말.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고 행복하다.

아침마다 동네를 돌며 홍시를 사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 어찌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귤쟁이라 만져보면 맛있는 귤인지 아닌지 감이 온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혹시나 상한 귤이 있는지 골라내고, 만져봤을 때 빨리 상할 거 같은 귤을 골라내 냉장고에 넣어둔다. 

홍시는 금방 물러지니 그때그때 사다 먹는 편이다.


보통 엄마와 함께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코스트코와 과일가게를 간다.(거의 루틴이 됐다)

오늘은 사과 8개 5000원에 샀고 단감 10개 5000원에 샀다. 포도는 한 박스에 13000원.

진짜 감격스럽다........ 부자가 된 거 같다. 돈만 있으면 과일 냉장고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가게를 하거나 내가 회사를 다닐 때는 서로 마주할 시간이 없으니 어딜 같이 갈 수도 없었는데 요새는 짝꿍처럼 돌아다니면서 장을 본다. 계란도 사고 우유도 산다. 집에서 코스트코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리는데 집에 차도 없고 버스 타기엔 애매해서 백팩을 메고 가거나 수레(구루마)를 덜그럭 덜그럭 끌고 간다.

30 평생 살면서 이렇게 엄마랑 같이 루틴처럼 장을 보러 다니는 게 처음이라 신기하다. 그리고 재미도 있다.

구경하는 재미, 물건들 비교하는 재미. 그러다가 철이 지난여름 반바지를 한 개에 5000원에 득템 하기도 했다. 집에 와서 아이처럼 좋아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났다. 


사실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혼자 있고 싶은데 자꾸 부르거나 대화를 하다가 다투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그러다 보면 짜증이 나기도 하고 홈트를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래서 작업실이 필요하고 나이가 들면 독립을 하는 이유라. 

혼자 구시렁 대며 불평불만을 하거나 가끔 티도 낸다. 그만 좀 부르라고. 나 뭐 하고 있다고.


근데 요새는 이런 시간 또한 나와 엄마와 또 아빠에게 언제까지 주어질까 생각했다.

어차피 앞으로 부모님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불평불만들 또한 그리워질 때가 올 것이라고. 아직은 멀었지만.


엄마랑 장을 보러 가는 길에 건너편에서 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손을 잡은 엄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다정하게 서로 말을 주고받고 엄마는 연신 아이에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옆에 손을 잡지 않고 어쩌면 살짝 거리를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엄마와 나의 모습과 많이 대조되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나도 어릴 때 엄마 손 저렇게 꼭 잡고 걸어 다녔겠지?"

"당연하지. 손 꼭 잡고 다녔지."



엄마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혼자 읊조리 듯 말했다.


"근데 지금은 왜 안 그럴까.."


그리고 걷는 내내 생각했다. 그러게 지금은 왜 엄마 손 잡는 거 조차 어색할까.

가끔 차도를 피하라고 엄마를 감쌀 때도, 팔짱을 낄 때도 어색하다.


팔짱을 끼고 친구처럼 걸어 다니는 모녀를 보고 있으면 괜히 부럽다.

내가, 우리 가족이 잘 못하는 거라서.


어쩌면 그 어린아이와 엄마는 나와 엄마랑 똑같은 마음일지 모른다.

성인이 되면서 사라진 스킨십 빼고는 바라보는 눈빛, 쓰이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오늘은 엄마 손이 차다는 핑계로 엄마 손을 용기 내 한번 잡아봤다.

나는 열이 많은 체질이고 손이 따뜻한 편이라 내 손을 잡은 엄마는 따뜻하다며 꼭 붙잡고 있었다.


몇 년 만에 제대로 잡은 엄마 손인지.

잡은 순간 느낀 것은 엄마 손이 많이 작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이렇게 나보다 작았나? 싶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크게만 보였던 엄마 손인데. 지금은 나보다 훨씬 작고 주름도 많아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가끔은 서러울 때가 있다.

받아들여야 하지만 가끔 싫을 때가 있다.


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나이를 들어간다는 것이 그렇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말을 꼭 예쁘게 해야지.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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