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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thewind Jan 03. 2020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김소연

사랑이라는 말에서 로맨스를 도려내고 나면

사랑이라는 말에서 로맨스(작가는 로맨스를 '멜로'라 부른다)를 도려내고 나면 이 책이 남는다. 


김소연 시인의 이름은 여러 번 들어봤는데 글은 이번 산문으로 처음 접했다. 읽는 내내 '시인이라더니, 산문으로도 시를 쓰는 시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산문인데, 시의 속도로 읽힌다.


책을 펴자마자, 내가 스무 살 때 생각한 사랑의 개념을 빠짐없이 늘어놓으며 사랑을 이것들에 국한시키는 것을 '사랑의 적'으로 규정한다. '설렘, 두근거림, 반함' 같은 말들. 내가 한 건 뭐냐고 투정부리고 싶은데 사실 나도 그 때 내가 한 것이 과연 사랑이었는지 의심을 품은지 오래라 잠자코 계속 읽었다. 어쩜 그렇게 매번 이 사랑이 첫 사랑인 것 같았을까. 그건 이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자각일 수밖에 없는데.


서늘한 앞 부분이 지나면 한동안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산문 같은 내용이 0.7배속 영화처럼 천천히 지나간다. "그는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심했다. 그녀는 낯선 사람들에게 무심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친절했다." 


하루 중 공상하는 시간이 길고 소중했던 중고등학교 때 품은 질문을 이 책에서 여럿 다시 만났다. 배워야하는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는 말처럼, 물어야할 질문은 중고등학교 때 이미 다 던져놓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안을 벌써 완성했어야 마땅한 나이(그땐 지금 나이가 그런 나이인 줄 알았다)인 지금 돌아보니 질문이란 묻는 것에서 의미가 있었고 거기서 끝났나보다. 사랑이라고 믿은 것을 처음 경험한 이후로 이런 질문들을 다시 생각해본 기억이 없다. 


'사랑을 사랑했다'는 호통, '우리가 학습해온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다'는 지적이 아프면서도 시원했다. 명사로 고정된 '사랑'이 아닌 '사랑함'에 대한 담론의 시작으로 '사랑은 사랑을 재배하는 능력이어야 하고, 사랑을 돌아보고 돌보는 것이어야 한다'는 물꼬를 트고 이 책은 끝나버린다. 같은 주제의 다음 책이 벌써 기다려진다.


"사랑을 사랑해온, 사랑을 명사로 고정하는 사랑의 담론들에 비켜서서, 사랑이 더 이상 감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게 내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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