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Дми́трий Шостако́вич

예술의 힘과 가치

by corda music studio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Дми́трий Шостако́вич

1906~1975


사회주의, 스탈린, 파시즘, 공포정치, 세계대전


쇼스타코비치가 살았던 소련을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적 비판을 담은 곡들을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면서도, 동시에 체제순응적 행보를 보이기도 해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으로 갈리곤 한다.


Schostakowitsch - Jazz suite 中 Walts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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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므첸스크의 맥베스 여인

Ledi Makbet Mtsenskogo uyez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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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험난한 음악활동의 본격적 시작은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여인'을 작곡하면서부터이다. 쇼스타코비치가 28세의 나이에 작곡한 이 오페라는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한 문장으로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주인공 카테리나의 '눈먼 욕망과 대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출장이 잦은 부유한 남편의 아내의 삶을 살던 카테리나는 무료하고 불만스러운 일상 중 남편의 동료 세르게이와의 섣부른 사랑에 빠지게 되고, 불륜을 위해 시아버지를 살인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남편, 조카까지 걷잡을 수 없이 살해하며 흉악 범죄자가 되어버린다. 이에 세르게이가 카테리나에게서 흥미를 잃자 결국 세르게이가 눈을 돌린 연적과 함께 강으로 투신한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여인은 쇼스타코비치의 고향 레닌그라드에서만 83회, 모스크바에서 94회 공연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톡홀름, 프라하, 런던, 취리히, 코펜하겐 등 해외 초청공연까지 이루어질 정도로 흥행하며 스탈린의 눈에까지 띄게 되었다. 그렇게 므첸스크의 맥베스 여인이 공개된 지 2년, 스탈린이 직접 므첸스크의 맥베스 여인을 보러 간다. 당시 스탈린은 권력을 위해 최측근과 친인척조차 가차 없이 숙청할 정도로 유례없는 공포정치를 펼치며 피도 눈물도 없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세르게이와의 관계를 눈치채고 방해하는 시아버지를 독살한 후 환각에 시달리는 카테리나

Schostakowitsch - Ledi Makbet Mtsenskogo uyezda


이 작품에는 주인공 카테리나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하는 독백(아리아)의 등장이 유독 잦다. 결국 스탈린은 이 작품을 끝까지 감상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공연연에 대해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더미', '조잡하고 천박한 작품', '쇼스타코비치는 타락한 *형식주의자'라는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이미 세계가 주목 중이었던 쇼스타코비치는 제아무리 스탈린이라 해도 명분 없이 건드릴 수 없었다.


* 당시의 우울한 사회분위기를 통제하기 위해 정부는 예술가들에게 "예술은 낙관주의를 설파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하고, 명확하고, 사실적인 작품을 요구했다. 이것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말하며, 그에 비해 당시 대부분의 유럽의 모더니즘에 따른 새로운 형식과 표현기법을 중시했던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주아의 예술, 형식주의라고 말하며 금기시했다.




2. 교향곡 4번

Symphony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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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은 나를 회개시키고 죄를 자백하게 만드려고 온갖 수를 다 썼지만 난 거절했다. 그 당시 나는 젊었고 육체적으로도 힘이 있었다. 회개하는 대신 교향곡 4번을 작곡했다.


이후 끊임없는 당국의 압박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로 뒤이어 쇼스타코비치는 정부가 권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한참 먼 교향곡 4번을 작곡했다. 하지만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당시 동료 음악가들의 만류와 함께 악보는 그의 서랍 속에 봉인되었고, 25년 후에서야 초연될 수 있었다.


Schostakowitsch - Symphony No.4 中 1st mov.




3. 교향곡 5번

Symphony N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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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조적 답변


'맥베스 여인 사건' 다음 해, 쇼스타코비치는 소비에트 혁명 20주년 기념일날 교향곡 5번을 발표했다. 곡의 내용은 이렇다: 노동자, 지하철, 공장의 기계, 소비에트의 문화와 과학, 예술, 공화국 인민의 스포츠를 즐기는 장면, 인민들의 감사와 열광...

물론 당의 위협과 압박이 계속된 탓도 있겠지만 돌연 태도를 바꾸어 사회주의에 순응하는 듯한 발언까지, 쇼스타코비치의 '독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을 발표하며 그는 잠시나마 조용한 나날을 보내는 듯 보였다.




4. 교향곡 7번

Symphony N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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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레닌그라드를 세계지도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정"


Schostakowitsch - Symphony No.7 中 4th mov.

(지휘자가 쇼스타코비치와 닮았다. 의도된 걸까?)


1941년, 사상자가 300만 명에 달했던 독소전쟁이 일어났다. 스탈린은 "레닌그라드를 세계지도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정"했다고 말하며 레닌그라드를 계획적으로 봉쇄해 버린 채로 30개월간 전쟁을 벌였다. 겨울은 영하 30도에 육박했고 전기, 식량, 수도, 약품의 보급도 없었다. 레닌그라드는 쇼스타코비치의 고향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소방대원으로 자원입대했다.

나치의 침공으로 인해 전쟁이 벌어졌기에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을 통해 있는 힘껏 독일의 파시즘과 히틀러가 남긴 참상을 비판했다. 불규칙한 반복과 신경질적인 악센트가 전쟁을 암시한다. 그는 이 곡에 대해 스스로 파시즘에 대한 투쟁, 적군에 대한 승리, 고향인 레닌그라드에 대한 헌정이라고 말했다. 교향곡 7번으로 인민을 대표해 나치를 비난하고 민족주의를 공고히 한 공으로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상과 레닌 훈장까지 수여받았지만,

사실 쇼스타코비치가 이 곡을 통해 비판하는 파시즘의 대상은 히틀러의 것뿐만이 아닌 스탈린을 포함하고 있었다.


+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Sixth Sense' 인트로에 샘플링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음원만 들었을 때에는 의도된 것이라고 느끼기 다소 부족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곤 하지만 뮤직비디오를 함께 보는 순간 그 시각적 콘셉트와 추가적 사운드들로 인해 음악의 정체성이 명확해진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 - Sixth Sense 뮤직비디오




5. 교향곡 9번

Symphony 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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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쁜 형식주의로 빠져들었으며
민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당이 옳다고 시인하며 나의 음악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겠다.



베토벤 9번 교향곡, 드보르작 9번 교향곡, 슈베르트 9번 교향곡, 말러 9번 교향곡, 브루크너 9번 교향곡... 9번 교향곡의 저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서양음악사에선 아홉 번째 교향곡을 마지막으로 펜을 놓은 작곡가들이 이상하리만치나 많다. 교향곡은 그 규모나 길이가 방대하기 때문에 한 곡을 작곡하는 데에만 해도 아주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우스갯소리로 "교향곡을 아홉 곡정도 쓸 때쯤이면 사람의 기력이 다 한다"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다. 그만큼 작곡가들에게 9번 교향곡은 원숙한 음악과 기량을 뽐내는, 그의 인생이 담긴 곡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그런 9번 교향곡을 체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의미를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그 이후로도 그는 음악과 예술 방면에서 달리 저항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1949년 체제선전용 영화인 '베를린 함락'의 음악을 제작한다거나, 1951년 스탈린의 산림정책을 찬양하는 '숲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생존을 위한 예술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물론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마자 쇼스타코비치는

“양분된 자아를 재통합”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체제의 폭력과 억압에 이기지 못한 저항, 어쩐지 익숙한 레퍼토리이다. 죽음을 무릅쓰는 영웅이 되지 않기로 결정한 그를 과연 우리가 변절자, 혹은 겁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Editor_D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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