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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da music studio Jul 26. 2024

음악에서의 텍스트의 힘

음악 청취에 관여하는 소리 밖 요소



  음악은 말하자면 소리다. 악기나 스피커처럼 소리를 내는 물질로부터 귀로 전달되는 소리 그 자체다. 그러나 흔히 ‘음악을 듣고 있다’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소리만이 스쳐 지나가는 경우는 드물다. 음악을 듣는 동안 사람들은 곡이 표현하는 대상을 언어와 언어적 이미지로서 떠올린다. 달빛이 내려앉은 호수의 정경, 비바람이 몰아치는 여름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이 소리 외부의 언어라는 요소는 우리의 음악 청취에 매우 깊게 관여하는 동시에 우리가 듣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버리기도 한다.




온전히 소리로 듣는가


  가사를 모른 채 해외 팝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음악의 분위기와 드문드문 들리는 단어 몇 개로 어떤 곡일지 추측하며 듣다가, 나중에 가사를 확인해 보면 대체로 처음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음악과 가사의 결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방비하게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청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곡들도 종종 있다. 화려한 춤선과 문워크 뒤에 “그 애는 내 아들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이나, 미니멀하고 귀여운 비트 속 적나라하게 섹슈얼리티를 노래하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34+35’이 그렇다. 음악만 들어서는 노래의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의 ‘34+35’ 뮤직 비디오 스크린샷 ⓒW Magazine


  다른 사례도 있다. 길거리를 거닐다 보면 악기로 가요를 연주하는 버스킹을 볼 때가 있다. 악기가 연주하는 멜로디에서는 당연히 가사가 흘러나오지 않고 소리만이 존재한다. 이때 그곳에 있는 관객들은 가사 없이 연주되는 그 음악을 모두 동일선상에서 듣고 있을까.

  예를 들어 비비의 ‘밤양갱’이 보컬 없이 바이올린과 MR로 연주되고 있다. 관객은 두 명이다. 한 관객은 밤양갱이라는 원곡을 이미 알고 있는 반면 다른 관객은 원곡을 모른다. 이때 곡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은 원곡과 그 가사를 생각하며 버스킹을 들을 것이고, 처음 듣는 관객은 오로지 악기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소리만을 들을 것이다. 같은 바이올린의 선율을 들으면서도 한쪽은 가사에서 노래된 이별의 이미지와 밤양갱을 떠올리는 반면, 다른 한쪽은 그저 이별이라곤 전혀 연상되지 않는 평화롭고 귀여운 선율을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이 둘이 듣고 있는 음악은 어쩌면 전혀 다른 음악이 아닐까.



제목이라는 텍스트


  이렇게 언어, 다시 말해 ‘텍스트’는 음악을 듣는 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음악을 듣기 전에 곡의 제목이나 가사, 곡에 얽힌 스토리 등을 읽는다. 이 모든 사전 정보는 그저 소리일 뿐인 음악과 만나 새로운 시너지를 형성한다. 이러한 음악들은 텍스트를 모르더라도 충분히 좋은 음악으로 즐길 수 있지만, 텍스트와 함께 들을 때 가장 온전하다.

  이와 같이 음악 외적인 텍스트의 영향을 받고 이미지나 이야기를 표현하는 음악을 이야기할 때 자주 제시되는 용어가 하나 있다. 바로 ‘표제음악’이라는 개념이다.

  표제음악.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단어일 것이다. 직역하자면 표제(제목)가 붙은 음악으로, 주로 보컬이 없는 기악음악에서 사용되는 개념이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비발디의 ‘사계(Le Quattro Stagioni)’부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고별(Les Adieux)’,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 등이 있으며, 이러한 수많은 음악들이 제목이라는 음악 외적인 텍스트, 즉 이야기나 이미지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교향곡 1번’, ‘피아노 소나타 2번’ 등 마땅한 제목이 붙지 않은 곡들과 상반된다.

  사람들은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을 들으며 천둥이 치고 비와 우박이 내리는 여름 하늘을, 겨울 1악장을 들으며 매서운 겨울바람의 한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드뷔시의 달빛에 흐르는 섬세한 멜로디와 서정적 화음을 들으며 은은한 밤하늘 위로 달이 환히 뜬 호수의 정경을 떠올린다. 즉 음악을 들으면서 소리 이전에 음악이 표현해 내는 텍스트나 이미지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표현해 내는 음악의 강력한 재현 능력에 매료되며 귀를 기울이게 된다.



전혀 다른 두 이야기가 한 음악에 담기다


  텍스트가 음악에 끼치는 영향이 이렇듯 막대하다면, 반대로 음악은 과연 텍스트를 얼마나 잘 반영할까? 텍스트가 있다면, 19세기 음악학자인 한슬리크(Eduard Hanslick)는 이에 대해 한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했다. 18세기 오페라 작곡가 글루크(Gluck)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Orfeo ed Euridice)’에는 ‘에우리디케를 잃고(Che Farò Senza Euridice)’라는 오르페우스의 아리아가 등장한다.

  글루크의 대표작인 이 아리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나의 에우리디케를 잃었네. 어떤 것을 나의 이 불행에 비할 것인가.”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의 극심한 슬픔을 표현한 대목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부아에라는 이는 이 선율에 다음과 같은 가사를 붙여도 좋았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나는 나의 에우리디케를 찾았네. 어떤 것을 나의 이 행복에 비할 것인가.”

  잃음과 찾음. 불행과 행복.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사가 한 노래에 자연스럽게 붙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도 크나큰 놀라움을 자아낸다. 그리고 음악이 텍스트를 너무나도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는 동안, 그 텍스트를 담아내는 방식은 단일하게 지정되어있지 않으며 극히 자유롭다는 점을 시사한다.


들어보기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Orfeo ed Euridice)’ 중, 아리아 ‘에우리디케를 잃고(Che Farò Senza Euridice)’


글룩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공연 모습 ⓒMetropolitan Opera



텍스트가 음악에서 지니는 의미


  음악에는 수많은 별명이 있다. ‘만국공용어’는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수식어일 것이다. 음악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주고받기에 가장 강력한 언어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각기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대상을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는 음악만의 빼어난 재현 능력이 존재한다. 이에 지금껏 수많은 이미지와 이야기가 소리로 치환되어 음악의 공감각적 세계 위에 펼쳐져왔다.

  텍스트를 표현하는 음악의 힘이 이렇게 지대한 것처럼, 음악의 표현 대상인 텍스트가 음악에게 미치는 영향도 마찬가지다. 그 많은 사례들을 베토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유명을 넘어 클래식의 대명사로 불리는 베토벤의 5번 교향곡에 누군가 '운명‘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러자 네 음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장중한 패시지는 무겁게 문을 두드리는 운명이 되었다. 베토벤 중기 피아노 소나타 대표작 중 하나인 14번에는 누군가가 ‘월광’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러자 멜로디에서 달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17번에는 누군가 ‘템페스트’라는 별칭을, 18번에는 ‘사냥’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그러자 쉬지 않고 지속되는 16분음표의 패시지는 거세게 휘몰아치는 폭풍이, 코드(Chord)와 함께 등장하는 붓점 리듬은 사냥꾼의 말발굽 소리가 되었다.

  이 모든 곡들에 이러한 별칭을 붙인 것은 대체로 베토벤 자신이 아니었으며 출판업자나 주변인이었다. 엄밀히는 작곡자가 열심히 창작한 곡의 정체성을 타인이 정해버린 꼴이다. 그래서 원곡자가 붙이지 않은 부제가 붙은 이러한 곡들에는 제목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더러 존재한다. 원론적으로 옳은 시각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 모든 부제들이 타의에 의해 붙여졌다곤 하나 이제 와서 완전히 무가치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을 들을 때 월광이라는 제목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가. 물론 곡을 작곡가의 의도에 따라 철저히, 완벽히 해석해 보려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떠올려보자. 그저 느리고 서정적인 c# 마이너의 분산화음에 은은한 월광의 푸른빛이 스며드는 광경을. 그것은 음악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그러나 음악이기에 언어의 보조를 통해 비로소 피워낼 수 있는 마법 같은 현상이기도 하다.


월광, 달빛이라는 제목의 곡을 들을 때 사람들이 떠올릴 만한 이미지


  우리가 그저 소리만으로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마치 어둠 속에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걷듯 모국어의 텍스트를 경유하여 이미지와 이야기로서 음악을 감상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꽤나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원작자가 적어놓지 않은 부제를 굳이 붙였던 그 많은 사람들은 사실 모두 알았을 것이다. 텍스트가 음악에서 지니는 크나큰 존재감을. 아무리 소리 그대로에만 귀를 기울이려고 하여도,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우리를 어느샌가 잡아끌고야 마는 그 거대한 내러티브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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