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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da music studio Jul 30. 2024

[B열 큐레이션] 고전과 낭만 사이의 인터루드

베토벤 Part.1


  과거 서양음악 작곡가 중 아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 많은 이가 세 차례 안에 이 이름을 외칠 것이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베토벤’을 떠올림과 동시에 여러 이미지가 스친다. 은백색의 풍성한 머릿결과 빨간 스카프, 다혈질의 고집스러운 성격, 청력을 잃은 비운의 천재 작곡가, 악성, 혁명가, 리듬스타(?). 먼 과거, 먼 나라에 살았던 작곡가에 대한 정보가 이토록 대중적으로 떠다니는 것은, 과연 그의 작품과 그가 서양음악사에 남긴 업적이 대단함을 짐작케 한다. 그의 삶과 음악이 지나온 자취를 들여다보자.

월광 3악장을 게임으로 배웠어요. ©AnB Games

베토벤 개관


깨어남의 시대, 혁명이 낳은 혁명가


  서양 철학에서 칸트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 흘러 들어갔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

칸트(1724~1804, Immanuel Kant)는 이전까지 무수히 충돌해 왔던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하여, 선험적 앎과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주체적 이성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즉, 보편타당한 진리를 따르면서도, 인간 개인이 각자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추구하여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각 개인을 주체로 확립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과 독일 낭만주의로의 도입, 그 중심에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감히 이 사람을 서양음악사계의 칸트라고 소개하겠다.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2.17.~1827.03.26.) ©cultweek


“와! 베토벤 아시는구나!” 


  베토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을 잇는 인터루드(interlude)*.

하이든이 열고 모차르트가 발전시킨 고전주의 음악의 형식미**를 정점에 올려두고이로부터 탈피하여 개인의 감정 표현에 중점을 두는 낭만주의 음악의 포문을 열었다

  그의 작품 세계의 배경에는 계몽주의가 함께한다. 깨어남의 시대 한가운데 태어난 베토벤은 기존의 봉건 질서와 신분 계급 등에 강한 반항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음악에 고스란히 녹여내었다.

  그래서인지 베토벤에게는 유달리 ‘혁명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그러나, 어떤 혁명가도 혁명가로 태어나지는 않듯 베토벤 또한 ‘새로움’과 ‘혁명’을 쫓았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그 속에서 본인의 내면에 귀 기울여 스스로 믿는 바를 펼쳐 나간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과였으리라.


*간주곡. 두 악곡이나 극의 막 사이에 연주되는 음악.

**특히 소나타 형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아래에서 그의 음악과 함께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인디펜던트 뮤지션의 출현, 이건 ‘작품’이라고!


  음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당대 작곡가들과 베토벤을 구별 짓는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바로 음악을 대하는 태도’다.

1763년의 파리, 귀족들의 연회장에서 연주하는 모차르트.©Europeana


  음악이 처음부터 오늘날처럼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음악은 귀족들의 행사나 연회장을 채우는 인테리어 정도의 기능을 했다.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원하는 분위기의 음악을 만들어주는 것이 작곡가의 일이었고, 연주가 끝나고 나면 그 음악은 다시 연주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까 음악은, 그야말로 일회성 행사를 위한 외주 작업물 정도의 위상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시작점이 달랐다. 자신이 만드는 곡 하나하나가 세상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 여겼고, 때문에 클라이언트(!)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하려 했다. 존재 자체가 이유가 되는, ‘작품’을 만든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이 만든 작품에 직접 번호를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바로 Opus***, 줄여서 Op.다. 베토벤 이전에도 오푸스 넘버가 붙은 작품들은 있었지만, 보통 출판과정에서 붙은 것이 많고, 작곡가 본인이 직접 붙인 것은 베토벤이 최초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한곡 한곡을 평생 남을 것처럼 작곡했다니. (그래서인지 실제로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작곡가들에 비해 베토벤은 작품 수가 적은 편에 속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본인의 작품이 남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려나.


***작품 번호를 뜻하는 말. 오푸스 넘버 또는 오푸스라고 읽는다. 베토벤의 작품들 중 Op. 가 아닌, WoO로 번호가 기입된 곡들도 있는데, 이는 Werke ohne Opuszahl(작품 번호가 없는 곡)의 약칭이다.


1787년, 베토벤과 모차르트. 사람들이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Wikimedia


  음악을 향한 베토벤의 진지한 태도는 다음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소란스럽게 대화가 오고 가는 귀족들의 연회장에서, 연주 도중 피아노 뚜껑을 쾅 닫고 그대로 나가버려 모두를 벙찌게 만들었다고. 이따위로 들을 거면 듣지 말아라! 하는 식의 강경한 태도는, 청중으로 하여금 “지금 못 들으면 내가 손해인” 것으로 느껴지게 했을 듯하다. 실력으로 라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뛰어났던 덕에,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자세를 고쳐 앉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메인스트림을 벗어난 인디펜던트 뮤지션(!)적 사고를 했다는 그 자체도 놀랍지만, 음악 내적으로도 그의 행보는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베토벤의 음악


  베토벤은 57년 생애 동안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작곡하였다. 시기별로 작품 특징이 점차 달라져, 흔히 초기, 중기, 말기의 세 단계로 분류한다. 이는 꾸준한 시도와 발전을 통해 작곡가로서의 노련함을 더해갔다고도 보이지만, 베토벤 본인이 인생에서 마주한 사건들과 통찰이 그의 음악 세계와 동반되었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삶이 음악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음악을 통해 삶을 헤쳐 가기도 하면서.

베토벤의 삶 단편과 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들어보려 한다.


루드비히 반, THE 피아니스트


  처음 그가 대중 앞에 선 것은 작곡가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서였다. 어려서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 요한 반 베토벤 아래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고, 13살에 고향인 독일 본의 궁정 제2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였을 만큼 피아노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22살이 되던 1792년, 빈으로 이주하여 하이든을 만나고, 1795년 빈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이 시작된다.


  베토벤의 연주를 두고 뜨거운 반응이 일었다. “지금까지 이런 즉흥 연주는 없었다!”****하는 것이다기교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즉흥 연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으나이를 더 돋보이게 하는 데는 그의 연주 스타일도 큰 몫을 했을 듯하다매우 열정적인 연주와 함께피아노라는 악기로부터 유례없는 강렬한 음향을 뽑아내었다고.

  19세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피아노가 개량되고 발달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믿거나 말거나, 이때 베토벤의 연주스타일이 하도 과격하여 피아노 내구성 개발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피아노 제작사에서는 당시의 스타 연주자인 베토벤에게 새로운 피아노 모델을 협찬해 주고 피드백을 받아 가기도 했다는데, 지금으로 치면 피아노 인플루언서를 활용한 셀럽 마케팅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때마다 베토벤은 ‘더 풍부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더 튼튼하게 만들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는 클래식 음악과 ‘즉흥 연주’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만 하더라도 즉흥 연주와 장식음이 많다는 특징이 있었고, 이후 고전 시대, 그러니까 모차르트와 베토벤 시대 초까지도 즉흥 연주 능력은 피아니스트의 필수 덕목이자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큰 요소였다.



베토벤의 고난 극복 브이로그: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는 총 32곡으로, 첫 번째와 마지막의 작품 번호는 각각 Op.2, Op.111이다. 이는 곧, 초기부터 말기까지 베토벤의 온 생애에 피아노 소나타가 함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피아노 소나타를 순서대로 하나씩 들여다보자면, 젊은 시절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한 작곡가의 일대기를 훔쳐보는 기분이 든다. 이를테면 <베토벤의 고난 극복 브이로그> 같달까. 곡을 만들 당시 그가 마주했던 상황과 고민들, 그 안에서 느꼈을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특히, 1801~1802년, 가장 큰 시련과 함께 쓰인 16번, 17번, 18번의 세 소나타가 그러하다.

©Wikimedia

1800년, 왼쪽 귀에서 고음이 잘 들리지 않기 시작하였고, 베토벤은 주변에 이 사실을 숨겼다. 작곡가로서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던 작곡가의 커리어에 청력 이상이 웬 말인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진지한 만남을 이어오던 제자 줄리에타 귀차르디와의 사랑 또한 좌절되었다. 이후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베토벤은 자신의 친구인 의사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에게 이 사실을 알린 후, 1802년, 빈의 근교인 하일리겐슈타트로 요양을 떠난다. 곧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동생들 앞으로 유서를 작성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Und ich endigte selbst mein Leben – nur sie die Kunst, sie hielt mich zurück, ach es dünkte mir unmöglich, die Welt eher zu verlassen, bis ich das alles hervorgebracht, wozu ich mich aufgelegt fühlte, und so fristete ich dieses elende Leben -
나는 삶을 끝내려 했다. 오로지 예술만이 그런 나를 막아세웠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을 모두 만들어 소명을 다하기 전에는 세상을 떠날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이 비참한 삶을 부지하고 있다. (에디터 역)

죽음을 결심하는 대신 남은 평생을 음악에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한 것처럼 보인다. 유서를 작성한 이후 그는 세 곡을 묶어 작품 번호 Op.31로 출판하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템페스트’라 불리는 피아노 소나타 17번 Op.31-2의 전 악장은 하일리겐슈타트에 있을 때 쓰인 만큼, 그의 혼란스러움과 비통함이 강하게 녹아 있고, 이후 만들어진 18번 소나타에서는 시련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나타내듯 전 악장이 밝은 분위기로 되어있다.

‘템페스트’가 포함된 세 소나타 Op.31는 베토벤의 초기와 중기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그의 작품 세계 해석에 있어 중요하게 다뤄진다. 단지 그의 심리적 격동기와 함께하고 있어서 뿐 아니라, 작곡의 기술적 측면에서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도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Op.31 이후의 작품들에서 베토벤은 조금 더 과감하고, 한 단계 더 발전된 모습으로, 그야말로 영웅기를 맞이한다.


본디, 완벽히 익혀 자신의 것이 된 배움은 다시 깨끗이 잊는 것이 옳다고 했던가. 형식과 구조를 철저히 지켜오던 초기와는 반대로, 중기 이후 작품들에서는 그동안 만들어온 틀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이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3개의 소나타에 다다라서는 느린 악장을 생략하거나 한 악장을 변주 형태로 만드는 등 기존의 형식을 거의 파괴하는 데에 이른다. 계속해서 자신의 틀을, 그것도 이미 아름답고 공고하게 설계된 틀을 부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베토벤의 음악 실험실, 피아노 소나타를 두고 독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이렇게 말한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는 건반 음악의 구약성서를 이루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피아노의 신약성서를 이룬다.

- 한스 폰 뷜로 (Hans Guido Freiherr von Bülow, 1830~1894)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고난을 받아들이고, 그러므로 한 발짝 더 나아가려는 의지.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이를 실현하려는 강한 신념. 베토벤의 음악성보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그를 악성(樂聖)으로 만들고, 오늘날 그의 작품들을 성서가 되도록 한 근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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