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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da music studio Jul 23. 2024

피아노를 피아노로 연주하시오

피아노는 왜 피아노인가?

 


  어릴 적 피아노 학원을 다녀봤든, 6년간의 필수 교육과정을 어느 정도 적당히 수행했든, 의미 불명의 음표들이 잔뜩 나열된 감성 디자인으로 우연히 마주쳤든 간에 누구나 어떠한 경로로든 악보에서 위와 같은 고상한 필체의 악상기호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각각 피아노(piano, 여리게), 포르테(forte, 세게)를 지시하는 셈여림표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피아노라는 이름의 악기를 하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피아노를 피아노로 연주하라’는 말은 도무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피아노라는 이름을 차지하려던 두 대립 세력 간 공방전 및 타협 결렬 역사의 산물인가? 그런데 세상에! 알고 보니 피아노의 정식 명칭이 심지어 ‘pianoforte’란다! ‘piano’와 ‘forte’, 이쯤 되니 저들 사이 분명 우연이 아닌 어떠한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피아노를 피아노라고 부르게 했는가?



- 피아노는 왜 피아노인가?


  오늘날 흔히 즐겨 연주되는 가장 대중적인 악기를 꼽아보자면 단연 피아노나 기타라는 응답이 압도적일 것이다. 이 악기들의 공통적인 첫 번째 특징은 동시에 여러 음을 소리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화음을 연주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어지며, 선율과 반주를 홀로 수행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우리 신체에서 가장 세밀한 동작이 가능한 손가락의 힘이 소리를 내는 행위로 직결되기 때문에 빠르고 정교한 연주에 있어 상당히 유리하다. 특히나 피아노는 부드럽고 가녀린 일렁임부터 천둥처럼 몰아치는 웅장한 포효까지 보다 폭넓은 셈과 여림을 표현할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피아노에게 ‘pianoforte’라는 이름이 수여된 계기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세거나 여린 소리는 다른 악기들도 낼 수 있지 않던가? 최초의 피아노는 1709년 'Gravicembalo col piano e forte(피아노와 포르테가 붙은 쳄발로)'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셈과 여림을 용이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건반악기로서 상당히 주목할 만한 특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건반악기들과 어떠한 차이가 피아노를 피아노로 만들어주었는가?



- 검은 건반 흰 건반 색깔 서로 바뀐 ‘그 악기’


쳄발로
그랜드 피아노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바로크 서양음악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현물이라 칭할 수 있는 쳄발로는 겉보기는 현대의 그랜드 피아노와 상당히 닮았다. 하지만 쳄발로는 피아노와 달리 셈여림의 조절이 아주 제한적이었는데, 마치 기타줄을 픽(pick)을 이용해 뜯는 것과 같이 건반을 눌렀을 때 연결되어 있는 단단한 이 금속 현을 뜯는 방법으로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일정한 힘 이상을 가해야만 소리를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힘이 가해지면 악기가 망가지기 때문에 연주자가 건반을 누르는 힘만으로는 셈여림을 조절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반면 건반에 연결된 해머(hammer)가 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피아노는 연주자가 건반을 누르는 힘이 곧 음량이 되기에 손가락 힘의 통제에 따라 셈여림을 용이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가장 오른쪽 페달



  용이한 셈여림 조절과 더불어 피아노만이 가지는 또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은 댐퍼 페달(damper pedal, sustain pedal이라고도 한다)의 존재이다. 이 페달은 사용되지 않는 피아노곡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자주 사용되는 페달로서, 흔히 ‘가장 오른쪽에 있는 페달’이라고 부른다. 이 장치는 건반을 누른 후 손가락을 뗀 후에도 음이 지속되어 울리게 해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댐퍼가 음을 멈추는 것’을 멈추게 해주는 페달이다. 댐퍼는 눌려 있지 않은 건반에 해당하는 현들의 진동을 막아 연주 중에 의도치 않은 수십 개의 무작위 음이 동시에 울리는 불상사를 막아주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댐퍼 페달은 이것을 역이용해 댐퍼의 작동을 연주자가 선택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해서 오히려 음이 지속되는 현상을 활용한다는 가능성을 실현한 장치이다. 이를 통해 연주자는 손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마치 손가락이 수십 개 달린 거대한 손을 가진 것처럼 음과 음 사이를 끊지 않고 부드럽게 잇는 것이 가능 해졌고, 한 손으로는 불가능했던 멀리 떨어진 건반의 음도 동시에 울리도록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렇다면  군요!


  피아노는 화음을 연주할 수 있는 건반악기의 이점과 미리 조율되어 있는 안정적인 음정, 그리고 풍부한 표현력으로 작곡가들의 사랑을 받으며 각종 앙상블 곡들의 반주와 협주 역할을 도맡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7옥타브가 넘는 넓은 음역대를 가지고 있어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대체해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활용도가 높아졌으며, 피아노만을 위한 테크닉 또한 활발히 연구되어 쇼팽과 리스트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여러 피아노 비르투오소들과 수많은 피아노곡들을 배출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에 있어 피아노는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장르의 음악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시각적으로 음의 높낮이나 화음 구조를 파악하기 쉬워 음악 교육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악기로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피아노는 어째서인지 악기들의 최종 등용문을 넘지 못하고 결국 정규 오케스트라의 구성 악기로 영입되지는 못했다.


고전시대와 낭만시대를 걸친 피아노 연주법의 폭발적인 발전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 아주 요술만은 아니었군요!


  피아노가 정규 오케스트라 구성 악기가 되지 못한 1차원적 이유는 휴대가 힘든 피아노를 매번 연주마다 품을 들여 옮기는 것이 어렵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또 악기들의 개별적인 소리보다는 주로 ‘악기 군’ 단위로 여러 악기들의 음색을 조합해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오케스트라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이미 훌륭한 솔로 악기로서 입증된 피아노를 그러한 역할 중 하나로 편성에 추가하는 것이 상당히 비효율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좀 더 학문적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다. 피아노 협주곡을 유심히 들어본 적이 있다면 피아노가 앞으로 나서는 순간 오케스트라가 숨죽이는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비단 음량 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피아노가 소리를 지속하는 방법이 관현악기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현악기나 관악기는 각각 활을 현에 마찰하는 동안, 숨을 불어넣는 동안 같은 음량으로 음을 지속할 수 있다. 이것을 '지속음'이라고 하며 오케스트라 곡에서 화성적 배경을 조성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피아노는 건반을 누르는 순간 한 번의 어택이 일어난 이후 여음만을 남긴 채 빠르게 소리가 사라진다. 수많은 단원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있는 오케스트라에서 지속음을 내지 않고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솔로 악기로써 앞으로 나서는 방법, 또는 끊임없이 건반을 눌러 소리를 내는 방법 정도가 있고 이는 연주시간이 길어질수록 연주자에게 큰 부담을 주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역시 대중의 수요와 활용도를 고려하자면 피아노의 입지를 위협할 만한 악기의 등장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다음은 피아노의 특징과 매력을 십분 느껴볼 수 있는 추천 곡들이다. 

물론 개인의 취향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우연히 알고리즘을 타고 등장한 곡이 더 마음에 들 확률이 아주 높다.





1. 순한맛 - 오타쿠 자아를 억제하고 이성적으로 선별한 식상하고 맥 빠지는 선곡


 Liszt: Transcendental Etudes No. 4: 'Mazeppa'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4번 ‘마제파’

임윤찬의 연주 (youtube)


  이미 수없이 지겹게 들어봤을 분들을 위해 독특한 해석을 담은 임윤찬의 연주를 추천한다. 하지만 그조차 미스터치를 몇 번 내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도대체 이런 반주를 하며 선율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연주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에튀드, 즉 연습곡은 피아노를 연주함에 있어 자주 요구되어 평소 익혀두면 좋은 기교들을 연습할 수 있도록 의도해 작곡된 곡을 칭하며,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초절기교 연습곡’은 말 그대로 초-절의 기교를 연습할 수 있도록 여타 작곡가들의 연습곡보다 높은 편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 그중 네 번째 곡인 ‘마제파’는 연습곡임에도 독주곡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 자신의 기량을 뽐내고자 하는 연주자들에 의해 자주 연주되곤 한다. 먼 거리에 있는 건반을 정확하고 빠르게 왕복하는 과정에서 조금의 망설임이라도 보인다면 관객이 단박에 알아챌 수 있고 음과 음 사이 찰나의 순간 페달을 매우 기민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음악의 흐름 자체가 끊기는 까닭에 섣불리 선보였다간 겉멋과 의욕이 앞선 비참하고 안타까운 연주가 될 수 있다는 거대한 위험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연주자들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연주자 비 친화적인 배려 없는 기교들 때문에 거장 피아니스트들의 연주 음원 중에서도 아주 성공적인 경우가 드물다.



2. 깊은맛 - 아주 조금 약간 살짝 취향을 반영한 선곡


Chopin: Ballade No.4

쇼팽: 발라드 4번

짐머만(Zimerman)의 연주 (youtube)


  쇼팽의 발라드는 영화에도 다뤄졌을 정도로 강렬하고 격정적인 1번이 가장 인지도가 높은데, 나머지 발라드들 또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수작으로 꼽힌다. 그중 4번은 우리가 가장 인식하기 쉬운 주요 선율 외에도 여러 개의 부가적 선율들이 비교적 동등한 중요도를 가지고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각 선율들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명확히 구분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선율들이 상호작용하며 어우러지는 정교함에 집중하는 동안 크고 작은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며 서서히 음악이 고조되어 1번과는 다른 은은한 맛의 격정과 광기를 느낄 수 있다. 우리에게 피아노 음색의 여운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Zimmerman의 연주를 추천한다.



3. 매운맛(신라면정도) - 한입만 잡솨봐요...


Prokofiev: Piano concerto No.3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유키네 쿠로키(yukine kuroki)의 연주 (youtube)


  앞선 곡들보다 후시대의 음악에 익숙하지 않다면 사뭇 다른 분위기의 화성과 정서에 다소 난해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협연하는 협주곡으로,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와 같이 연주될 때에 솔로 피아노곡의 경우와는 어떻게 사용법이 달라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유키네 쿠로키(Yukine Kuroki)의 연주는 표정과 제스처에서 곡을 이해하고 즐기는 것이 느껴지며 카메라워크도 상당히 친절해 영상으로 즐기기 좋다. 다만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의 해머가 작동하는 원리에 주목해 피아노를 타악기처럼 다루곤 했는데 이 연주에서도 그를 반영해 조금 더 공격적인 음색의 피아노를 썼으면 훨씬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맑고 예쁜 음색의 피아노를 사용해서인지 쾅쾅 내려치는 파워에 한계가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개리 그라프만(Gary Graffman)의 연주가 완급조절과 테크닉이 취향에 맞아 가장 좋아하고,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다닐 트리포노프(Daniil Trifonov)의 연주는 본인이 프로코피예프의 작곡 의도를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듯한 독특한 연주법이 재밌어 한번 찾아볼만하다(하지만 표현이 조금 과한 면이 있다). 교과서 같은 이상적이고 깔끔한 연주를 좋아한다면 선우예권의 연주를 추천(어떻게 이 곡을 미동도 없이 연주하는 거지?).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형식에서 세 악장을 모두 합쳐 30분이라는 꽤 압축적인 러닝타임에 다양한 장면들과 음향들이 알차게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피아노 기교가 쉼 없이 등장해 귀를 즐겁게 해준다. 다만 서정적인 편은 아니라 주로 ADHD 기질이 있거나 MBTI가 ENFP인 친구들이 유독 1악장을 맘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editor_D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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