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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다래 Aug 26. 2020

천천히 비우기

결혼 5년 차 부부의 이사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고 집을 알아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일 조금씩 비워나갔다. 쓰레기봉투를 하나씩 채워 나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제법 큰 가구들까지 비우려고 시도하고 있는 중. 한 달 넘게 계속해서 비워가며 느끼는 건 날 잡고 하루, 이틀, 아니 한 달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된다던가, 집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는 건 아니라는 사실. 


 최근 미니멀리스트라는 해시태그로 포털사이트 메인에 심심찮게 소개되는 집들, 사람들, 공간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몇몇 글들을 읽다 보면 정말 이게 미니멀리스트의 삶인지, 혹은 인테리어나 집 광고인지 판단할 수 없는 글들도 접하게 된다. 저렇게 넓은 집에서 살면 나도 미니멀리스트 아닌가? 우리 집 물건 다 가져다 놓아도 저 집 다 못 채우겠는데? 그릇들은 하나같이 왜 저렇게 고급져? 미니멀리스트 부자만 하는 거? 하는 자격지심이랄까...


 결국은 내 방식을 찾을 수밖에. 나는 20평도 안 되는 조막만 한 빌라에 살고 있고, 집에 물건은 넘쳐난다. 나는 책 부자이고, 호군은 건담 부자이다. 나는 옷 부자이고, 호군은 추억 부자이다. 부자이지만 물건으로 가득 채운 부자일 필요는 없다는 건 서로 잘 알고 있다. (아.. 건담은 아직 합의 전이지만 ㅠㅠ) 그래도 물건에 대한 욕심을 바로 내려놓기는 어렵다. 그래서 난 천천히 비우기로 했다.




 시작은 지난번 글을 쓴 것처럼 쓰레기봉투 채우기. 잡동사니부터 버렸다. 오늘 내가 마음먹었으니 다 정리해버릴 테다, 하는 욕심 따윈 없었다. 거실에 있는 서랍을 하나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 중 더 이상 나에게 필요 없고, 사용할 수 없는 물건들부터 꺼냈다. 사용기한이 훌쩍 지난 약들, 고무로 된 손잡이 부분이 끈적해진 문구들, 근 2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았던 물건들을 꺼내 누굴 공짜로 주기에도 부끄럽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다 쓰레기봉투 안으로 직행. 서랍 순서대로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나가니 일이 빠른 느낌이었다. 


 서랍 하나가 끝나고 정리가 지겨워지면 정리를 멈췄고, 한 서랍이 끝나지 않았더라도 봉투가 차면 정리를 멈췄다. 신이 나서 속도를 붙여 마구잡이로 쑤셔 넣을 수도 있었지만, 왠지 기분에 휩쓸려 버리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사놓고 사용하지 않은 새 물건들을 찾게 되었고, 누굴 줘도 괜찮겠다는 물건들이 보이면 빈 상자를 찾아내 상자에 물건을 모아두었다. 


 그렇게 정리를 하다 보니 내가 건들지 못하는 그룹이 생겼다. 호군의 물건 꾸러미들. 집안에 쌓인 건담과 그 상자들, 그리고 추억꾸러미-시부모님이 주신 물건들과 우리가 결혼하며 여행하며 살며 쌓인 잡동사니들이다. 건담은 답이 없다. 우선 패스. 그러나 추억꾸러미는 정리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호군의 고집으로 정리가 안 되는 물건들이다. 아버님이 주신 크고 무거운 바둑판, 어머님이 주신 주방 그릇과 냄비,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부모님이 주셨으니까 끌어안고 있는 물건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펼쳐보면 우리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 날 거야 라고 생각하며 가지고 있는 항공권, 영수증, 바우처 등등의 기념품들. 


 너무나 처분하고 싶다... 하지만 처분하면 호군이 너무나 서운해한다. 호군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게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정리부터 했다. 결혼식과 관련된 각종 종이들을 파일 하나에 다 넣었다. 영수증, 사진, 계약서, 편지, 웨딩촬영 CD 모두 파일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순서 모르겠고, 손에 잡히는 대로 넣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알아보기 힘든 영수증이나 식권!! 같은 것들은 한두 장만 남기고 다 종이백에 넣어두었다. 같은 방식으로 여행하며 가져온 물건들을 파일 하나로 정리해버렸다. 


 그렇게 정리한 파일 두 개와 종이백 하나를 호군에게 보여줬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우선 종이백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살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살려서 파일에 넣어라- 그리고 정리된 파일은 나중에 호군이 보기 좋은 순서대로 다시 꺼내 정리하여라 하고 건네니, 파일은 보지도 않고 버린다는 종이백에서 살릴만한 물건부터 뒤지고 있다. (으휴-) 그렇게 다시 몇 장을 건져낸 뒤 넣어둬 넣어둬 하고 자리를 뜬다. 흐흥 그래? 뱁새눈을 하고 호군을 불렀다. 이것 좀 볼래?


 내가 물건 정리를 하니 이런 걸 다 찾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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