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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다래 Nov 12. 2020

잘 가, 배추야. 너를 많이 생각했어

오늘의 청소 - 냉장고 야채칸

 쌈도 싸 먹고, 배춧국도 끓여먹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알배추 하나를 샀는데,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버렸다. 냉장고에는 두 달쯤 들어있었나 보다. 야채칸을 열 때마다 아 저 배추 먹어야 하는데, 저 배추 시간이 좀 지났는데 먹어도 될까, 저 배추 꽤 된 거 같은데 왜 곰팡이가 안나지? 그렇게 바라만보다 두 달이 지났다. 배추를 먹은 시간보다 배추를 생각한 시간이 더 많다. 어제저녁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며 냉장고 야채칸을 열었더니, 오랫동안 생각한 바로 그 배추가 풀이 죽어 있다. 배추는 풀만 좀 죽었을 뿐 아직 하얗고 반짝인다. 




 예전의 난 정말 보기 드문 '밥파'였다. 가능하면 끼니는 밥을 먹고, 못해도 하루 한 끼는 무조건 밥을 먹어야 해,라고 엄마와 똑같은 이야길 내 입으로 뱉곤 했다. 그래서 언제나 냉장고엔 밥을 위한 식재료들이 가득했다. 밑반찬으로 만들 멸치나 진미채도 사다 놓았고, 콩나물이나 애호박 같은 것들로는 콩나물국이나 된장찌개 끓여먹을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밥 할 힘도 없어 외식을 하거나 호군이 야근으로 늦는다 연락이 오면 난 내 허기를 달랠 뿐 그 식재료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도 귀찮고, 피곤하니까. 그렇게 쟁여놓은 야채들은 반찬이 되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향했고, 심지어 양가에서 받아온 김치엔 하얀 골마지(효모라고 하지만)가 올라와 대형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사야겠다며 편의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이런 생활을 3년 정도를 반복한 뒤 회사생활을 그만 둔지 2년이 지난 지금, 밥하고 반찬 할 시간은 많아졌지만 난 내가 밥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밥파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보다 식사를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더 중요한파가 되었다.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게 되니 모든 음식은 준비와 정리를 최소화하는 식단을 궁리하게 된다. 계란이나 고구마, 감자를 찌고 야채를 잘라 에어프라이어에 오일을 두른 뒤 구워먹는다. 소박한 아점으로 부족하지 않은 양만큼 먹는다. 


 요즘 우리 집 냉장고는 전에 없이 쾌적하다. 난 매일 식사에 '밥'을 고수하지 않게 되었고, '국'과 '찌개'도 아주 드문 경우에나 한 번씩 할까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소량만 구입해 가능한 그날 다 소비한다. 창고형 마트는 연어와 하얀 달걀을 사러 가고 대부분 동네 마트에서 만원 미만으로 장을 본다. 할인율이 큰 온라인 마켓은 어쩔 수 없이 한 달에 한번 이용하는데, 그땐 공산품 위주로 구입한다. 매일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밥상에 올릴 반찬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덕분이다. 


 예전과 다를 것 없는 생활이지만 마음은 전처럼 무겁지 않다. 저거 다 먹어치워야 하는데, 저거 썩으면 다 갖다 버리기도 어려운데 어떡하지- 하고 걱정할 만큼의 양이 냉장고에 들어 있지 않다 보니 언젠가 먹던지 버려도 가책이 덜하다. 야채칸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야채의 가짓수가 줄어든 덕분이다. 알루미늄 포일로 꽁꽁 싼 양파와 (이렇게 보관하면 한 달 넘게 먹을 수 있다) 삼겹살 먹을 때 대량 구매한 마늘, 가격이 비싸 고민을 100번도 넘게 한 양배추와 부쳐먹어야겠다 생각한 애호박 하나. 냉장고를 채운 내 소박한 야채들.




 야채들을 모조리 꺼내어 종이봉투에 넣고, 냉장고 야채칸을 청소했다. 주방은 좁은 데다 냉장고는 커서, 냉장고 문이 180도로 열리지 않아 야채칸을 빼 내 수세미로 박박 닦아낼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베이킹소다를 희석시킨 물을 분무기에 담아 야채칸에 찹찹 뿌리고 마른걸레로 닦아주었다. 바닥에 눌어붙은 야채 썩은 찌든 때, 김치 국물 흘린 것, 머리카락(잉?) 등이 닦여 나온다. 오늘은 냉장고 야채칸 하나가 내 최선이다. 


 두 달 넘게 들어있던 알배추와 너무 오래 들어 있어 봉투가 삭은듯한 목이버섯은 음식물 쓰레기봉투로 향한다. 희고 반짝이지만 두 달을 넘긴 알배추를 먹을 용기는 없다.


 두 달간 정말 많이 생각했어.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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