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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다래 Nov 17. 2020

댕강, 긴 머리를 잘라버렸다

오늘의 청소 - 바닥 닦기

 오랜 시간 동안 여행을 가겠다 마음먹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파마를 했다. 여행을 떠나면 머리를 자르기도 쉽지 않을 테니 길면 긴 데로 묶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으로. 8개월 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머리는 짧아지지 않았다. 머리 자르는 것도 다 돈인데, 그냥 길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렇게 일 년을 다시 보내니 머리가 제법 길어져 브래지어 라인 밑을 훌쩍 내려왔다. 외출을 할 때 단순히 감고 잘 말리면 딱히 꾸미지 않아도 제법 여성스러운 느낌이 풍겨 나쁘지 않았다. 내 인생에 이렇게 긴 머리는 처음이었다.




 이 머리는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머리를 땋고 묶고 만져보길 좋아하는 아이들은 내게 조심스레 다가와 머리 땋아도 돼요? 물었고, 난 얼마든지 내 머리를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너무 예뻐요, 나도 빨리 머리를 기르고 싶어요- 하며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면 금세 머리는 자라니 열심히 밥을 먹으라고 응원해 주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조카들과 친구 따님들 사이에선 예쁜 숙모, 예쁜 이모가 되어있었다.


 주말에 식사하러 오라는 초대를 받아 시댁에 갔는데, 형님이 날 붙잡고 하소연하신다. 얼마 전 미용실에 가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 그 모습을 본 조카 둘이 엉엉 울며 머리 자르지 말라고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숙모처럼 긴 머리의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짧은 머리는 싫다고 엄마 머리를 붙잡고 엉엉 울었단다. 갑자기 머리가 띵- 했다. 내 머리가 내 조카들에게 여성성의 상징처럼 비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조카들이 이렇다면 내 친구들의 아이들도 나를 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걸까. 


 머리 자를 궁리를 했다. 이왕 이렇게 기른 머리이니 그저 쓰레기통에 넣기는 아까웠다. 검색을 몇 번 하니 소아암에 걸린 친구들에게 머리카락을 기부할 수 있는 사이트가 있었다. 최소 길이는 30cm 이상이어야 하고, 염색이나 파마는 하지 않은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호군을 시켜 길이를 재어보니 30cm가 훌쩍 넘는다. 다음 날 머리를 고무줄로 묶고 미용실로 가 묶은 채 댕강 잘라달라 말씀드렸다. 미용실 선생님은 아깝다, 아깝다를 연발하며 스윽스윽 가위로 머리를 잘라내고 남은 머리를 다듬어 주셨다. 오랜만에 드러난 뒷 목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기분이 새로웠다. 


 친구 아이들을 만났다. 내 머리만 보면 달려들던 그 아이는 짧아진 내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 예전엔 공주님처럼 예뻤는데, 지금은 그냥 아줌마 같다고. 대신 친구의 머리는 제법 기른 상태였다. 아줌마는 똑같은 아줌마고, 머리를 길러도 기르지 않아도 예쁜 아줌마인건 변하지 않는다며 앞에서 잘난 체를 좀 해줬다. 조카들에겐 사진을 보냈다. 조카들은 카톡에 난리를 쳤다. 온갖 이모티콘이 쏟아져 나왔지만 댕강 자른 머리카락 사진 한 장으로 끼약- 징그러워하고 말았다. 그래, 이렇게 징그러운 머릴 내가 이고 지고 다녔단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니 바닥 청소가 한결 쉬워졌다. 예전엔 머리카락 한두 가닥만 떨어져 있어도 부담스러웠는데, 짧은 머리카락은 내 것이 아닌냥 모르는 체 한다. 호군 꺼 아니야? 좀 주워- 뻔뻔하게 말하면, 머리카락 굵기만 봐도 내 것이 아닌 걸 알겠다며 툴툴거리지만, 조용히 테이프를 말아와 바닥을 찍는다. 


 극세사 걸레를 물에 한번 헹구고 밀대에 끼워 바닥을 닦는다. 예전 집은 바닥에 찌든 때가 있어서 닦아도 닦아도 걸레가 까매졌는데, 이사 온 집에선 온통 먼지와 머리카락뿐이다. 무슨 집에 먼지가 이렇게 많이 쌓이지? 의아할 정도로 방문 뒤나 벽 구석에 먼지들이 데굴데굴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렇게 스윽스윽 바닥을 밀어 먼지를 모아 쓰레기통 앞으로 밀대를 가져가면 걸레에는 온갖 먼지와 머리카락이 뭉쳐있다. 손으로 스윽 떼어내 쓰레기통에 버리고 걸레는 가볍게 빨아 욕실에 널어둔다.


 여전히 머리카락은 우수수 빠진다. 하지만 전처럼 내 머리카락이 부담스럽진 않다. 길이가 1/3?로 줄어들어 전보다 1/3 만큼 덜 더러워 보이는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내가 내 주변의 여자 아이들에게 '여자=긴 머리'라는 성적 고정관념을 주지 않는다는 것.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에 짧은 머리의 공주님이나 짧은 머리의 영웅이 나왔으면 좋겠다. 내 바닥 청소만큼이나 내 조카들의 편견을 청소하는 일도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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