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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다래 Nov 23. 2020

쓰기 싫어도 써야 한다

오늘의 청소 - 샴푸

 "나 정수리 부분이 너무 따갑고 아파. 한번 봐줘"


호군이 내게 머리를 들이민다. 아, 또, 왜... 하며 정수리 부분을 살피는데, 벌겋게 부어있다.


 "머리 왜 이래?"

 "몰라. 갑자기 그래"

 

 최근에 생긴 변화라고 하면... 샴푸를 바꾼 것 밖에 없다. 호군은 두피가 예민해서 사용하던 샴푸를 바꾸면 한 번씩 이렇게 부어오르고 옅은 머리카락이 후드득 빠져 얼마 남지 않은 머리가 더... 휑... 하다. 그래서 이번엔 탈모에 좋다는 샴푸로 바꿔줬는데도 이런 상황이다. 할 수 없이 다른 샴푸를 꺼내 통에 담아줬다. 이 샴푸는 제발 호군에게 맞길 바라며. 비싸게 주고 샀고, 대용량으로 샀는데 (무려 1000ml) 이것마저 안 맞는다고 하면 그건 모두 내 차지라는 뜻이다. 바꾼 샴푸 역시 일주일은 머리가 아프다고 난리였는데, 일주일이 지나니 적응이 됐는지 그 소리가 들어갔다. (혹은 비누로 머리를 감고 있을지도)


 이렇게 호군이 쓰다 뱉은 제품은 오롯이 내 차지다.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고, 내 머릿결에 대한 계획이 원대하건만 매번 호군이 트러블로 인해 사용하지 않는 제품을 내 머리에 쏟아부어야 한다. 은은한 샴푸 향을 풍기고 싶지만 내 머리에선 한방 원료가 들어간 탈모샴푸의 향기가 풍긴다. 젠장.


 우리 집엔 이렇게 쓰기 싫어도 써야 하는 제품들이 있다.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샴푸부터 오래전 여기저기서 받은 비누, 손이 가지 않는 바디로션, 화장품을 살 때 끼워 받은 샘플용 화장품... 내 취향대로 사고 싶지만 내 취향을 주장하기 전 우리 집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 불필요한 물건들을 쌓아두지 않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편인지라 누군가 뭔가를 주겠다고 나서면 넣어 둬 넣어 둬 하며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곤 하는데, 지금 이렇게 쌓여있는 물건들은 거절할 수 없는 관계나 상황에서 받은 거라 쓰지 않으면 버려야 하는 상황이다.


 마음 편하게 버려버리면 좋을 텐데- 쉽지 않다. 세숫비누로는 맘에 들지 않지만 빨랫비누로 활용해도 좋지 않나? 바디로션으로 쓰기엔 너무 향이 강한데, 풋크림 정도면 쓸만하지 않나? 멀쩡한 제품을 버린다는 생각은 죄책감이 따르고, 버리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난 계속해서 찾고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 내 취향은 사라지고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만 남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난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내 취향의 물건을 늘어놓고 지내고 싶은데, 도대체 그때는 언제쯤 도래하는 것인가요?


 블로그나 인스타를 통해 남의 부엌을 들여다보는 날이면 더 심란하다. 저 화이트 냄비, 무쇠 프라이팬 너무 갖고 싶다. 저걸로 밥을 하면, 저걸로 계란 프라이만 부쳐도 너무너무 맛있겠지? 솥밥 따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주제에 남의 블로그에서 본 솥밥을 보며 당장 전기밥솥을 가져다 버리고 싶다. 우리 집에 있는 분홍 냄비는 꼴도 보기 싫을 지경. 

 

 난 언제 주방 물건들을 바꾸나. 나도 주방 물건들만 바꾸면 요리 유튜버나 인스타 셀럽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럼 난 또 한동안 이런저런 제품의 가격을 비교하고 비슷한 성능을 가진 중간 정도의 가격의 합리적인 제품을 검색한 뒤 그래! 이 정도면 적당해! 하고 내적 합리화를 시도하지만, 결국 구매 버튼을 누르진 못한다. 난 합리적인 가격의 제품이 가지고 싶은 게 아니라 고가의 브랜드 제품이 가지고 싶은 내 욕망을 알고 있고, 그 제품을 갖기 전까진 아무리 비슷한 제품들로 주방을 채워 넣어도 만족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난 갑자기 해탈한 스님처럼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조용히 사용하던 물건들을 마저 사용하게 된다. 탈모 샴푸로 탈모가 아닌 머리를 감고, 속이 울렁거리는 향의 바디 로션을 코를 막고 발뒤꿈치에 바르며, 꼴도보기 싫은 분홍 냄비에 파스타 면을 삶는다. 이렇게 몇 개월을 더 지내면 탈모샴푸나 바디로션도 언젠가 바닥을 드러낼 테고, 냄비도 코팅이 벗겨져 기쁜 마음으로 분홍 냄비를 버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럼 난 이번에야 말로, 정말 내가 사고 싶은 걸 사야지.


 얼마나 다행이야. 내가 깨끗해지면 깨끗해질수록, 맛있는 음식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런 날은 더 빨리 찾아올 수 있다는 게. 한번 더 씻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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