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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다래 Dec 17. 2020

보이지 않는 물건을 꺼내는 일

오늘의 청소 - 꼭꼭 숨어라 

     이사를 오고 3개월이 지났다. 이제는 제법 이 집에 익숙해졌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행복해- 따뜻해- 라는 말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이사를 온 뒤 초반엔 여기저기 짐이 널려있었는데, 이제는 어딘가로 쏙쏙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갔는지 집이 깔끔하다. 만족스럽다.




 마트에서 장을 봐 연어 한팩을 사 왔는데 손질한 뒤 숙성을 시키려면 플라스틱 통이 필요하다고 한다. 항상 쓰던 밀폐용기를 떠올리며 싱크대를 열었다. 꺼내려는 통은 가장 뒤 안쪽에 숨어있다. 앞에 있는 작은 통들을 우선 꺼내 쌓아두고, 다시 위에 올려진 통들을 꺼내 옆으로 밀어두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 있던 큰 김치통을 꺼내 열어 그 안에 든 중간 사이즈의 플라스틱 통을 호군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시 그 과정을 반대로 반복. 연어 손질을 마치고 통을 설거지한 뒤 물기를 닦아 다시 자리로 넣어야 하는데- 다시 꺼내고 꺼내고 꺼내고... 나 지금 뭐 하는 거니?


 우리 집엔 구석구석 꽁꽁 물건이 숨겨져 있다. 버린다고 버렸지만 버린 축에도 들지 못하는 건가? 책만 200권이 넘게 정리했는데 아직도 우리 집엔 100권이 훨씬 넘는 책이 있다. (이렇게 정확한 숫자를 알고 있는 건 원피스 전권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 그릇과 머그잔, 플라스틱 통 따위를 엄청 버렸는데 아직 싱크대엔 많은 수납 그릇들이 가득 숨겨져 있다. 전에 살던 집에서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그릇들도 상단에 자리를 잡고 세를 과시한다. 나는 정리하고 버렸지만 현재 집은 꽉 들어차 있다. 


 일반 쓰레기로 당근으로 고물상으로 버리고 나누고 비웠지만 싱크대는 숨 쉴틈 없이 꽉 들어차 있다. 데헷- 혀를 빼꼼 내밀고 수줍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싶지만 꺼내고 꺼내고 꺼내고 넣고 넣고 넣고 를 반복하다 보니 웃기는커녕 한숨이 다시 절로 난다. 도대체 난 뭘 그렇게 숨겨 놓은 것인가- 안 되겠다. 우선 꺼내고 보자, 이 두 눈으로 내 짐을 확인해야겠다 싶어 우선 꺼내기 시작했다. 상단 그릇장은 건들기 힘드니까;; 우선 하부장에 있는 수납 그릇과 냄비, 각종 세제와 조리도구들. 차곡차곡 포개져 예쁘게 들어차 있는 나의 쓰레기들- 


 사놓고 얼마나 썼지? 내가 이걸 쓸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하나하나 들어보고 고민했다. 꺼내고 또 꺼내니 간 마늘을 블록으로 얼리는 실리콘 용기도 있다. 이런 게 여기 들어있었는데- 난 비닐백에 마늘 넣겠다고 그 고생을 했나- 차곡차곡 통에 사이즈별로 수납하여 들어있으니 안에 들어있는 작은 용기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용 자체가 어렵구나. 우선 가장 큰 김치통부터 아웃. 근 2년간 사용한 적이 없고, 역시나 이번 김장에서도 넌 네 역할을 찾지 못했다. 하나하나 가지고 있을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고 생각난 김에 냉동실 문도 열었다. 냉동실에서 얼어 뚜껑이 깨진 채 열 일하던 플라스틱 통을 바꿔줬다. 손 다치니까 조심해!라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그 용기를 드디어 바꾼다. 


 우리 집을 좀 더 가볍게- 내 삶을 좀 더 미니멀하게 한다는 건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신경 써야 한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이 집의 사이즈에 맞게 꽁꽁 숨겨 놓은 구석구석의 짐을 꺼내 나에게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정말 필요한 물건들로만 채워놓는 생활. 한숨을 푹푹 쉬며 싱크대 하부장을 정리했으니 남은 건 상부장과 옷장과 책장, 장식장.... 왜 이렇게 많지? 숨어있는 짐을 꺼내 늘어놓고 내가 죽거나 니가 생명을 다할 때까지 서로 책임질 수 있는 물건만 남기는 일. 내가 지향하는 미니멀 라이프. 단순한 삶이다.


 ps.

 분홍 냄비 바닥 코팅이 드디어!!! 벗겨진 거 같아서 기쁜 맘으로 호군에게 코팅이 벗겨져 버렸어~!!! 하고 슬프게 외치니 호군이 슬쩍 와 보더니 한마디 한다. 설거지를 대충 한 거 같은데? 내가 해볼게- 어? 그리고 분홍 냄비는 아쥬 새것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너는 우리 집의 전설이 되어라. 젱장.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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