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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다래 Dec 28. 2020

냉장고에 뭐가 너무 많아

오늘의 청소 - 냉장고 비우기

 얼마 전 우연찮은 기회로 채소 정기 배송이라는 서비스를 알게 되었다. 유기농이나 저농약 농산물 중 마트에 판매되지 않아 버려질? 채소들을 구입해 격주로 배송해주는 서비스이다. 조금 못생겼다는 이유로 마트에 공급되는 규격 외 제품이라는 이유로 먹을 수 있는 멀쩡한 아이들을 구해준다는 서비스의 취지가 좋아 4회 구독을 신청하고 지금까지 2번을 받아 소비하였다. 우리는 두 식구이기에 배송받는 채소의 양이 매우 적절하고- 평소에는 먹을 줄 몰라 구매하지 않을 야채들이 종종 배송되어서 골고루 먹기에는 딱 좋은 서비스.  만족도가 높아 집에 놀러 오는 동생들에게도 종종 추천한다.


 배송 전 문자를 통해 다음 회차에 배송될 야채 리스트들을 보내주는데, 내가 받아볼 회차에 일이 있거나 받을 야채를 소비하기 힘든 경우 한 회를 건너뛰는 것도 가능하다. 돌아오는 회차의 야채들은 내가 소비할 수 없는 종류의 야채가 너무 많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 한 회 미루기를 신청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야채 쇼핑. 지나가는 마트에서 샐러리가 1250원! 싸다! 싶어 한단 집어 들고, 콩나물국을 끓여먹어볼까 싶어 콩나물 한 봉지를 넣었다. 쌈무 거의 다 먹었는데- 이번엔 피클을 담아볼까 하고 무를 하나 사고, 거리두기가 언제 3단계로 올라갈지 몰라 두려워하며 양파를 한 망 더 샀다. (양파 러버입니다 호군이)


 한차례 쇼핑을 마치고 산 야채들을 바로바로 소비하면 좋으련만...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나를 자꾸 새로운 동영상으로 인도하고 넷플릭스에서는 흥미로워 보이는 이야기들이 자꾸 상위 리스트에 노출된다. 똑같은 모양의 동물을 세 개 맞추면 팡~하고 터지는 아주 고릿적 시절 그 게임은 왜 지금도 재미있는지 난 손에서 게임을 놓질 못하겠고, 도서관 반납 알람이 오기 전에 조금씩 책도 읽어두어야 한다. 냉장고에 들어찬 이것저것들을 빨리 손질해서 어떻게든 먹을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아야 하는데- 난 도무지 그 시간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문자가 오고야 말았다. 이번 주 금요일에 이런저런 야채들이 배송될 예정입니다- 어엉? 벌써 2주나 지났다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빈틈없이 꽉꽉 뭔가가 들어차 있다. 이 상태로 다시 야채가 배송되면 더 이상 들어갈 데라곤 아무 데도 없다, 모두 버려야 한다- 는 위기감에 머리와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지금 냉장고 야채칸에 있는 야채들을 비워야 한다. 야채들을 비우려면 냉장고 칸칸마다 들어차 있는 락앤락 통들도 어떻게든 처치해야 하는데- 지금은 뭘 만들어봤자 들어갈 데가 없는 상황. 난 여태 받아온 김치 때문에 냉장고가 넘치는 줄 알았는데- 김치는 한번 먹을 양밖에 없다. 김치도 없는 집에!!!! 왜 냉장고가 터지는 거죠?


 눈으로 스캔하여 뒤에 숨어있는 통들을 꺼내니 샐러리와 무로 만든 장아찌 통이 하나 나왔다. 아... 없는 줄 알았는 데 있었네요 ㅠ 엄마가 보내준 울외 장아찌 5kg 와 김장할 때 김치는 안 가져가도 좋으니 너희가 좋아한다는 깍두기와 무말랭이는 가져가라며 싸주신 통이 계속해서 나온다. 와우... 배추김치만 없을 뿐이지 김치 많구나. 그리고 각종 소스류. 된장, 고추장, 양념장... 저는 괜찮습니다- 하며 극구 사양했건만 그래도 우리 집 냉장고를 채우고 있는 장류. 하- 일이 많다.


 장류는 냉장고 구석으로 밀어놓고 큰 통에 담겨있는 장아찌와 김치들은 모두 작은 통으로 옮겨 담았다. 바로 꺼내먹는 반찬들은 한 칸에 모아 두고 작은 통으로 옮긴 숙성 식품들은 아래부터 채워 올라갔다. 그랬더니 딱 반칸이 나온다. 으하하. 그렇게 다 정리했는데 반칸만 나오는 게 맞나요;;; ㅠㅠ 그다음엔 야채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차례. 샐러리는 일주일이 넘게 방치되어 있어 잎이 시들시들- 꺼내서 박박 닦고 어슷썬뒤 쌈무 물(재활용)과 간장 설탕 식초를 넣고 끓여 다시 장아찌를 만들었다. (한 줄기씩 마요네즈 찍어먹는 것도 한계가 있다.) 콩나물은 오늘 점심 비빔국수에 넣어먹자 싶어 데친 뒤 소분해 둘로 나누어 놓았다. 하나는 비빔국수용 다른 하나는 떡볶이에 넣어 먹어야지. 무는... 피클이 남은 게 있으니 무조림으로 가자. 무를 크게 썰어 넣고 갖은양념을 한 뒤 멸치 한 줌으로 완성되는 무조림- 


 그릇들을 정리하고 야채를 씻고 데치고 소분하고,  요리를 하는 것만으로 반나절이 지났다. 그래도 마음이 아직 편치는 않다. 냉장고에 차 있는 게 이렇게 마음 불편한 일이었다니- 내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신나게 한 쇼핑에 된통 당하는 기분이랄까. 소비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야채들에 미안하고, 게으른 주제에 욕심만 많은 나님이 한심할 뿐. 콩콩 머리를 쥐어박고 정신 차린다. 오늘부턴 다시 집밥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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