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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다래 Dec 30. 2020

노잼 다큐인 줄 알았지만,
유잼 힐링 무비

넷플릭스 - 나의 문어 선생님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호군과 내가 다이빙을 배울 생각을 한 건 세부에서다. 다이빙이 꼭 하고 싶었다기보다, 세부에 가면 으레 해야 하는 해양 액티비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린 공기통을 메고 바다에 겁도 없이 뛰어들었고, 숨이 멎을듯한 바닷속 풍경에 반해버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닷속, 출렁이는 식물들과 그 사이를 바삐 오가는 물고기들. 세부를 즐기고 난 뒤 우린 한국에서 프리 다이빙을 배워보기로 했다. 오랫동안 바다에 머물며 바다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 몸으로 내가 원하면 언제든, 바닷속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 이유였다. 바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이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그 세계를 만나길 바랐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동안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거나 짧은 걸 봐야겠다-하고 시간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찾다 발견한 <나의 문어 선생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예고편 속에서 한 남자가 롱핀 하나로 바다에 뛰어들어, 기다란 해초 숲 사이를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팬데믹으로 여행이 어려운 지금 상황에서 화면으로 만나는 바다는 못 견디게 매력적이었고, 다큐는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장르라면 스토리를 따라가야 한다는 부담 없이 바닷속 풍경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관찰자이자 이 다큐를 이끌어가는 남자는 매 장면 바닷속으로 입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가 입수할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함께 숨을 참고 바닷속 구경을 시작한다. 바닥을 가득 매운 형형색색의 성게, 까맣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홍합, 기다란 줄기에 하늘거리는 잎이 유영하는 다시마 숲... 그렇게 숨을 참고 들여다본 바다는 내가 본 적 없는 풍경이지만, 지금 내가 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저 성게를 어느 바다에선가 본거 같아, 내가 저 물고기는 확실히 봤다- 확실히 본 적이 있어- 하고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그리고 주인공 문어가 등장. 바다에서 문어는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이 다큐의 주인공이 등장했으니 좀 더 집중.


  문어는. 문어일 뿐. 감정 이입하지. 말자. 이 문장을 머릿속에 넣고 영화 속 문어를 바라보았다. 바닷속 생물에 내 감정을 투영하고 인격화하는 순간 문어의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언제 누군가에 붙잡히는 순간, 내 감정도 터져버릴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거리를 두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감정적으로 문어에 몰입하였다. 저 주인공 아저씨는 관찰자일 뿐 그 어떤 생태계의 흐름에도 영향을 주어선 안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문어가 위험에 빠졌을 땐 탄식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왜. 도와주지. 않는 거죠. 당신 다큐의 주인공이잖아요! (신나게 몰입 중인 나님)


 실제 문어의 지능은 꽤 높고, 우리 주변의 개나 고양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내가 마음을 주었던 강아지들처럼 나는 지금 저 문어에게 마음을 주고 있고, 어떻게든 이 다큐의 주인공이 살아남길 바랐다. 이 영리한 문어는 작은 화면 밖 내 마음을 아는 듯 꽤나 조심성 있고 영리한 태도로 위기를 넘겼고, 다양한 먹이 사냥을 했고, 사람 남자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스스럼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전까지는 음식으로밖에 알지 못했던 문어가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



 그렇게 문어 이야기를 따라가다 문득 딴생각에 빠졌고, 어느 순간 이야기의 흐름을 놓쳐버렸다. 아마 문어가 파자마 상어에게 다리를 뜯긴 채 동굴 속에 틀어박혀 하얗게 질려있다가, 시간이 흐르고 뜯긴 자리에 돋은 작은 다리를 본 뒤일 것이다. 새로운 다리를 뻗어 다시 힘차게 사냥을 시작하려는 문어의 모습에서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괜찮은가? 내 상처는 아물었을까? 혹시 난 내 상처를 돌보지 않은 채 너덜거리는 살점을 매달고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지금 세상 속에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나? 정말?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들에게 들었던 수많은 말들이 나에겐 지금까지 아픔이고 상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버릴 수 있는 말이지만, 계속 그 말이 내 정신을 지배하고 내 삶을 괴롭혔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에 대해 단정하는 말이 한 번씩 툭툭 나를 건드리고 나를 어지럽힌다. 오래 알던 사람이 나를 생각해서 해준 말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고민하였는데,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하면 그저 나를 향한 가스라이팅이었을 뿐. 애정 없는 허울뿐인 충고에 휘둘려 내가 계속 아팠다. 내 인생에서 꺼져버렸으면.



 바닷속 풍경이나 감상할 생각으로 시작한 이 짧은 다큐는 내가 잊고 있었던 내 상처를 들여다보게 하고 진짜 그 상처를 치유했는지를 물었다. 괜찮으냐고, 니 상처는 다 아물었냐고. 아물지 않았다면 동굴 속에서 좀 더 기다리며 작은 다리를 뻗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도 된다고. 뭐야- 이 망할 영화는. 상어와 추격전을 벌일 때는 언제고 왜 지금 나한테는 위로를 하는 건데- 눈에 잠깐 눈물이 고였지만, 눈을 부릅떴다. 아이쿠 이게 무슨 짓이람. 




 이건 주말에 호군이랑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화면보다 TV 속 큰 화면으로 감상하는 바다는 좀 더 근사하고 아름답겠지. 이 짧은 영화 한 편으로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너무 많다. 바닷속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앞으로 우리가 떠날 여행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루 종일 이야기해도 부족할 것 같은 기분. 우리가 다시 여행하고 바다 다이빙을 할 수 있다면 오늘 본 수많은 동물들 중 하나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다큐멘터리는 매번 진지하거나 심각해서 선택하기 힘든 장르 중의 하나였는데-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다큐 쪼랩인 나도 몰입할 정도로 흥미로웠다. 다음엔 시간 때문이 아니라 좀 더 자연의 세계에 밀착하길 원하는 마음으로. 



나의 문어 선생님 / 2020 / N 영화 / 전체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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